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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α

미국 흑인음악의 역사와 영화 [노예 12년]

필드 홀러, 가스펠, 블루스, 재즈, 리듬앤블루스, 소울.. 미국 역사와 음악.

 

제86회 아카데미시상식(2014)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노예 12년(12 Years a Slave, 2013)>은 1840년대부터 1850년대 초까지 12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흑인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역사를 좀 알 필요가 있는데, 현재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토인 북아메리카는 원래 백인들의 땅이 아니었다.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황인'에 가까운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이 몇천년 전부터 이미 살고 있었으며, 흔히 얘기하는 1492년 이후 백인들의 침략에 의해 원주민들의 찬란한 문화는 파괴된 것이다.
[영화를 주의 깊게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노예 12년>에도 이 원주민들의 음악 연주가 초반에 잠깐 등장한다]

 

아무튼 16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스페인 · 프랑스 · 영국이 북아메리카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고, 18세기 후반에는 유럽인 정착지역의 대부분을 대영제국이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정책에 불만을 품은 '백인'들이 소위 말하는 '미국 독립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1775~1783)'을 벌였고, 1800년을 전후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점점 더 하나의 국가로서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러니 한마디로 미국은, 원래 황인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유럽 백인들이 몰아내고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이다가, 스스로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백인들이 유럽의 지배를 벗어나며 만든 국가인 것이다(그러므로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 자체도 논리적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면, 흑인들은 도대체 왜 북아메리카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됐을까? 단순하게 설명하면 이런 거다. 16세기 초부터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동부지역으로 넘어온 백인들은 애초부터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북아메리카 대륙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만들어 가면서 남부와 서부로 차츰 영토를 넓혀가게 된다. 이와 동시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추방이 이뤄졌고(백인들의 야만스러운 처우와 전염병 때문에 원주민 인구는 90%나 감소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 독립전쟁도 벌어지게 된다.

 

그렇다 보니 기본적으로 일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주로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에 비해 농업이 발달한 남부는 특히 대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크게 부족했다. 결국 소수의 백인들이 남부의 대농장을 경작하기 위하여, 우리가 세계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온갖 폭력적인 수단을 다 동원해서, 아프리카 서부로부터 수많은 흑인들을 노예로 끌고오게 된다(이렇게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도중에 흑인 10명 중 1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 흑인들은 백인들로부터 아주 억압적인 인종차별을 당했고, 너무나 비인간적인 처우 속에서 하루 16시간이 넘는 엄청난 노동을 감내해야만 했다.

 

노예 12년 (12 Years a Slave, 2013)
드라마 | 미국 | 134 분 | 감독: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
출연: 치에텔 에지오포 (Chiwetel Ejiofor, 솔로몬 노섭 役), 루피타 니용고(Lupita Nyong'o, 팻시 役) 마이클 패스벤더 (Michael Fassbender, 에드윈 엡스 役), 베네딕트 컴버배치 (Benedict Cumberbatch, 윌리엄 포드 役), 브래드 피트 (Brad Pitt, 베스 役)

 

 

영화 <노예 12년> 속 자유주(州)와 노예주(州)

 

흔히 말하는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은 말 그대로 미국의 북부와 남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데, 이 전쟁의 중심에 놓인 문제가 바로 노예제 존폐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 미국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한 '자유 노동'이 우세했는데 반해, 남부는 대규모 농장의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했고 대농장 소유주들은 '노예 노동'을 필수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노예제도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와 함께 북부와 남부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18세기 후반의 독립전쟁 이후 계속되던 논쟁은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면화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와 때를 같이해서 점점 더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남부의 농장주들은 노예뿐만 아니라 더 많은 땅을 원했고, 북부의 자본가들 역시 기존의 모든 주들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인 '미개척 서부지역'을 막대한 이윤 추구의 기회로 봤던 것이다.

 

영화 <노예 12년>에 목화 재배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일 텐데, 이 작품의 시간적 무대인 1840년대는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있던 남부의 '노예주(州)'와 그렇지 않은 북부의 '자유주(州)'가 미국에서 공존하고 있던 시기다. 1861년에 남북전쟁이 발발했으니 이로부터 10~20여 년 전의 이야기이며, 19세기 초 노예수입 금지 이후 자유지역의 흑인을 납치해 노예지역으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가 한창 만연하던 시기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북부에서 자유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던 흑인 음악가였는데, 갑자기 인신매매범들에게 납치되어 노예상인에게 팔리고 급기야 남부의 대농장에서 12년 동안이나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연방제 국가인 미국은 남부와 북부가 이토록 달랐고, 노예제 폐지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조차 1858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노예제가 존재하는 주들의 노예제에 간섭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미국 흑인음악의 출발점, 노예들의 필드 홀러(Field holler)

 

앞서 말했듯이 숫자가 적은 백인들이 많은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광대한 농장을 관리하는 상황 하에서, 농장주들은 일상적인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 12년>의 주인공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의 두 번째 주인인 '에드윈 엡스(마이클 패스벤더)' 관련 내용에도 이런 모습이 간접적으로 등장하고, 예전에 백인 감독관이었던 사람의 대사를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백인들은 (어떤 불상사를 가져올지도 모를) 흑인들 사이의 대화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흑인들은 말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처지에서, 야만적인 백인의 총부리 앞에 동물보다도 못한 노예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 흑인 노예들은 힘든 노동을 버텨내고 또 살아남기 위해서, 뭐든지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늘에라도 대고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곧 '필드 홀러(Field holler)'라는 노예들의 노동요가 되었다. 이것은 같은 흑인들과는 거의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원치 않는 노동을 해야 하는 흑인들의 고통과 답답함·설움을 신께 호소하는 영적인 노래였다. 또한 백인들 입장에서도 힘든 노동을 해야만 하는 흑인들이 노래의 리듬에 맞춰 묵묵히 일하는 것(노동요 자체의 기능)으로 비춰질 수 있기에, 대화를 못하게 막는 대신 Field holler만큼은 완전히 금지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필드 홀러를 그저 단순히 노래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순수한 노동요 그 이상의 사회적 맥락과 의미가 흑인 노예들의 필드 홀러(Field holler)에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노예 12년>에도 주인공과 동료들의 필드 홀러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본격적인 시작, 가스펠(Gospel)과 블루스(Blues)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흑인 노예들의 Field holler는 종류도 많아졌고 형태도 다양해졌다. 마치 민요처럼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고, 구전된 필드 홀러는 미국 백인들의 개신교와 만나서 '가스펠(Gospel)'이 되는 한편, 산업의 변화와 흑인들의 도시 이주 등으로 보다 넓은 사회와 접촉하면서 '블루스(Blues)'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미국 흑인음악 중에 비교적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것들이 가스펠이고, 이와 달리 상대적으로 세속적인 색채가 강한 것들이 블루스인 셈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가스펠은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와 비슷한 형태의 음악이고, 블루스는 일반적인 Pop에 훨씬 가까운 음악인 것이다.

 

사실, 모든 침략의 역사에서 침략자들은 한 손엔 무력 또 다른 손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당근과 채찍'인 동시에 자기 스스로의 방어기제인 셈인데, <노예 12년>에서도 백인들은 항상 개신교를 입에 올리며 자신들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정당화한다. 주인공 '솔로몬 노섭'의 첫 번째 주인인 윌리엄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데, 흑인 노예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는 게 상당히 중요한 일과로 그려진다. 악명 높은 두 번째 주인 에드윈 엡스(마이클 패스벤더) 역시 언제나 종교 얘기를 입에 달고 살며, 이런 백인 주인들의 모습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흑인 노예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넓게 보면 일제 식민지 시절 한반도에서 침략자들이 사용한 당근과 채찍도 '근대화'와 '무력'이었고, 친일파들의 '식민지 근대화론'도 이런 측면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굳이 따지자면 <노예 12년> 속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음악들은 주로 필드 홀러와 가스펠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렇다고 가스펠과 블루스 간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연관된 장르이고,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냥 한꺼번에 전체 흐름을 이해하면 되는데, 다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필드 홀러(Field holler) · 가스펠(Gospel) · 블루스(Blues)를 알지 못한다면, 미국 흑인음악을 절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흑인 노예들의 필드 홀러가 블루스와 가스펠이 되었고, 또 '재즈(Jazz)'가 되었다. 바로 이 재즈를 기점으로 흑인음악은 진정으로 미국 음악의 중심으로 부상했고, 다음에 나올 리듬앤블루스(Rhythm and blues), 로큰롤(rock & roll) 등은 전 세계의 음악시장을 평정하게 된다.

 

그럼 이쯤에서 '가스펠의 여왕(The Queen of Gospel)'이라고 불리는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 1911~1972)의 gospel song 'Move On Up A Little Higher'를 들어보도록 하자.

 

 

다음으로 '블루스의 여왕(The Empress of the Blues)'인 베시 스미스(Bessie Smith, 1894~1937)의 노래 'Downhearted Blues'를 들어보자.

 

 

그리고 재즈(Jazz), 리듬앤블루스(R&B), 소울(Soul)..

 

현재 전 세계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음악 중에 태반은 예전에 노예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 Black American or Afro-American)'들의 문화로부터 나왔다. 아마도 흑인 노예들의 음악은 이들이 미국에 끼친 가장 큰 영향들 중에 하나일 것이며, 세계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일 것이다. 한 예로 미국의 대중음악을 얘기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빌보드차트일 텐데, 이 차트에 등장하는 음악들의 세부 장르만 봐도 상당수가 바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미국 대중음악의 주류에 있는 소울(Soul) · 록(Rock) · 펑크(Funk) · 힙합(Hip hop) 등은 모두 흑인음악의 유산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장르들이고, Disco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Dance music 장르, 이를 테면 Electro · House · Techno 등에서도 모두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에서 나온 음악이 모든 이의 음악이 되었으며, 요즘 한국의 아이돌들이 보여주는 음악은 물론이고 케이팝(K-pop) 전체적으로 봐도, 사실은 흑인음악에 그 기본 바탕을 두고 있는 부분이 무척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흑인음악을 얘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블루스(blues)'나 '소울(soul)'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감히 말하건대, 이걸 명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느끼는 것이다. 이것들은 마치 우리의 한(恨)처럼, 정서적이며 사회적인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한(恨)'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한(恨)은 그저 우리가 가진 것이고, 우리도 모르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한(恨)을 느낄 때, 미국 흑인들은 블루스와 소울을 느낀다. 음악 장르로서의 블루스는 재즈로 이어졌고, 나중엔 좀 더 대중적인 형태인 '리듬앤블루스(Rhythm and blues, R&B)'가 되었으며, 또 가스펠과 뭉쳐져서 '소울 뮤직(Soul music)'이 된다. 결국, 다 같은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Blues와 Jazz의 전설적인 여성 보컬리스트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1915~1959)'의 역사적인 곡 'Strange Fruit'를 한 번 들어보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싶다.

 

 

Strange Fruit - Billie Holiday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
남쪽지방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렸네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이파리에 묻은 피와 뿌리에 고인 피
Black bodies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검은 몽뚱이가 남풍을 받아 건들거리네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lar trees
이상한 열매가 포플러 나무에 매달렸네

 

Pastoral scene of the gallant South
당당한 남부의 전원적인 풍경
The bulging eyes and the twisted mouth
부어오른 눈과 뒤틀린 입
Scent of magnolias, sweet and fresh
목련의 향기, 달콤하고 신선한데
Then the sudden smell of burning flesh
어디선가 갑작스런 살 타는 냄새

 

Here is a fruit for the crows to pluck
여기 까마귀들이 뜯어먹을 열매가 있네
For the rain to gather, for the wind to suck
비를 모으고, 바람을 빨아들이는
For the sun to rot, for the trees to drop
햇볕에 썩어 문드러지고, 나무에서 털썩 떨어질
Here is a strange and bitter crop
여기 이상하고 쓰디쓴 열매가 하나 있네

 

 

이 노래가 묘사하고 있는 풍경은 <노예 12년>에도 그대로 나왔다. Strange Fruit은 바로 흑인의 주검인 것이다. 백인들에 의해 학살되어 참혹하게 나무에 매달린 검은 몽뚱이. 이 노래는 인종차별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며, 동족의 죽음에 대한 빌리 홀리데이의 눈물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가슴 속의 슬픔을 밖으로 터뜨리지 않고, 시종일관 읊조리듯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1939년에 처음 Strange Fruit을 들은 백인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같은 흑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걸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과연 이 노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게 바로 블루스이고, 또 재즈다.

 

곧바로 이어서, 역시 흑인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 보컬리스트이자 '소울의 여왕(The Queen of Soul)'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1942~ )의 기념비적인 곡 'Respect'도 들어보자.

 

 

1967년, 인종차별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킨 흑인들은 시위 기간 동안 이 노래를 소리쳐 불렀다고 한다.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며 노래를 들었다면 이유는 굳이 말 안 해도 알 수 있을 텐데, 가사 자체도 그런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런 게 바로 소울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이 자기가 영어로 노래 좀 한다고 아무렇게나 막 갖다 붙이는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순전히 장르적인 소개를 위해, 그저 설명의 편리함을 위하여 블루스니 소울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블루스나 소울을 알기 위해서는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 <노예 12년> 속의 미국 흑인음악

 

앞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음악 연주가 <노예 12년>에 잠깐 등장한다고 말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에서 음악가인 주인공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미국 흑인음악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것도 꽤 중요한 요소 아닐까?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음악을 접하게 됐다는 사실.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현재의 미국 흑인음악을 이루는 요소 중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부분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싶다.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황인에 가까운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들과 흑인인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들의 만남..

 

작품 속에서 그리 비중 있는 장면은 아니지만, 굳이 꼭 필요하지도 않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등장시킨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북아메리카는 오래 전부터 그들의 땅이었는데,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에 의해 이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원래 자유인이었고, 노예가 되기 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도 역시 자유인이었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이 백인들 때문에 자유를 박탈당했고,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마저 침해받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음악 연주를 보는 주인공 '솔로몬 노섭'의 표정에는 이 모든 비극이 다 담겨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 비교적 인간적인 첫 번째 주인 윌리엄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솔로몬에게 악기를 선물하는 장면이 특별한 의미가 있고, 같이 일하던 흑인 노예의 죽음 앞에 울먹이듯 부르는 솔로몬 노섭의 필드 홀러가 그토록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 아닐까? 영화 속의 여러 정황상 이 무렵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요인 필드 홀러가 본격적인 가스펠로 변화되는 단계인 듯한데, 그런 측면에서 전반부에 등장인물들이 불렀던 노래와 후반부에 부르는 노래가 약간 성격이 달랐던 것 같다. 전자가 말 그대로 필드 홀러라면, 후자의 가사 내용은 좀 더 가스펠에 가깝지 않나 싶다. 그래서, <노예 12년>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흘러나왔던 바로 그 흑인 영가 [Roll Jordan Roll]을 마지막으로 들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