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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뮤직(Soul music) 같은 Soul food, 그리고 한국인의 소울푸드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청어람미디어의 에세이집 [소울푸드].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소울뮤직(Soul music)이란 게 있다. 영어사전을 검색해 보면, '1950년대 후반에 발달한 흑인 음악으로 리듬앤블루스와 가스펠이 섞인 음악 형식'이라고 나오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 Black American or Afro-American)들의 역사와 문화를 좀 알 필요가 있다. 현재 전 세계 대중음악 시장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음악 중에 태반은 본래 약자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들의 음악을 얘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가스펠(Gospel)과 블루스(Blues), 그리고 소울(Soul)이다. 또한, 이 문화들이 도대체 뭔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소수의 백인들이 남부의 대농장을 경작하기 위하여 온갖 폭력적인 수단을 다 동원해서 서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끌고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들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 소울뮤직(Soul music)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면, 좀 뒤에 본격적으로 살펴볼 이번 포스팅의 주제 '소울푸드(Soul food)'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관련글 - 리듬앤블루스(R&B)와 로큰롤(rock & roll), 가스펠(Gospel)과 블루스(Blues) 그리고 재즈: 흑인의 음악은 어떻게 우리 모두의 음악이 되었는가 [클릭]


과연, 여기서 말하는 소울(Soul)이 뭘까? 그리고 리듬앤블루스(Rhythm and blues, R&B)와 가스펠(Gospel)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처음에는 흑인 노예들의 필드 홀러(Field holler)가 있었고, 이것이 종교와 만나 가스펠이 되는 한편 세속적으로는 블루스(Blues)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재즈(Jazz)가 출현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드디어 좀 더 대중적인 형태인 리듬앤블루스가 나타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가스펠과 리듬앤블루스가 합쳐진 것이 'Soul music'이고, 소울뮤직과 마찬가지로 원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로부터 파생된 음식문화, 그러니까 그들이 먹던 여러 가지 음식들(Fried chicken, Black-eyed peas, Sweet potatoes, Cornbread ...)이 바로 'Soul food'다.

소울뮤직이 흑인들의 고단한 삶을 음악으로서 위로해 주었듯이, 소울푸드도 그들이 가진 삶의 허기를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소울푸드는 그저 단순히 어떤 요리가 아니라, 사연을 가진 인간들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영혼의 음식인 것이다. '소울(Soul)'은 마치 우리의 '한(恨)'처럼, 언어로는 분명하게 설명될 수 없는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그 무엇'이며, 자신의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특별한 느낌이다. 그리고, 흑인의 Soul music이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음악이 되면서 한국에서도 소울뮤직을 만드는 사람들이 생긴 것과 같이, 흑인의 Soul food도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들만의 소울푸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Aretha Franklin - The Definitive Soul Collection - 10점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노래/워너뮤직코리아(WEA)

아레사 프랭클린 - Chain of Fools

그러면 지금부터, 국내 인기 작가 21인(김어준, 성석제, 김창완, 강병인, 남무성, 노익상, 박상, 박찬일, 백영옥, 서유미, 안은영, 이우일, 이지민, 이충걸, 이화정, 정박미경, 조동섭, 조진국, 차유진, 한창훈, 황교익)이 말하는 한국인의 진정한 소울푸드에 대해서 들어보고, 우리들의 영혼에 난 상처를 다독여주며 살아갈 힘을 주는 자신만의 Soul food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자. 다만, [소울푸드]는 저자들이 스스로의 경험을 각자의 언어로 쓴 에세이집이기에,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만 적는 것보다는, 각 에세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곧바로 옮기는 게 이 책의 느낌을 오롯이 더 잘 전달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목차 순서대로 저자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표현한 문장을 아래에 그대로 남긴다. 소울뮤직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 '소울의 여왕(The Queen of Soul)'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1942~ )의 명곡 'Chain of Fools'를 들으며..


백영옥 - 주먹밥의 맛
"허기란 그저 물리적인 배고픔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배고프고, 우정에 배고프고, 시간에 배고프고, 진짜 배가 고픈 것이므로 우리 삶에 대한 가장 거대한 은유다. 내 인생에 소울푸드가 있다면 아마도 두 손으로 꽁꽁 만들어놓은 이 주먹밥일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해 힘들어하던 때, 더 좋은 꿈을 꾸기 위해 달려가던 때, 그저 조용히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먹던 따뜻한 밥."

조진국 - 내 친구가 만드는 과자, 이브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열심히 이브콘만 만드는 내 친구. 과자를 먹을 때마다 그런 내 친구를 생각한다. 첫맛은 달콤하지만 끝맛은 살짝 매콤해서 느끼하지 않은 이브콘. 달콤함에 입안이 환하게 열리다가도 가슴 한편이 매콤하게 젖어오는 이브콘, 노트에 여배우 얼굴을 그리며 세상의 좋아하는 모든 것들의 차트를 함께 만들던 내 친구, 이제 그 녀석과 함께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친구 차트를 만들라고 하면 나는 그를 맨 윗자리에 두고 떠올릴 것이다."

서유미 - 당신의 첫 피자는 어떤 맛이었나요?
"허름한 피자집 덕분에 그는 피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고 피자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 뭔가를 함께했다는 건 각인이 되는지 그는 피자를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난다고 했다. 연애 시절 그는 피자를 사서 자주 내 손에 들려주었고, 결혼 후에는 퇴근길에 종종 피자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안은영 - 연애는 한 그릇의 카레라이스
"나는 소년이면서 신사인 남자를 만나 연애하면서 카레를 알았다. 그때처럼 맛있는 카레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식의 맛은 혀가 아니라 뇌가 기억한다.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전날의 카레를 데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남자라야 함께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남자는 귀한 선물 같아서 쉽게 와주지 않는다. 애석한 일이다."

이화정 - 햄버거에 대한 명상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어서도, 문득 그 비자 없이 다녀온 미국 생각이 날 때면 버거킹 와퍼를 먹다가 꼭 반쯤 남기고 단단한 하겐다즈 초코바를 조심스럽게 앞니로 깨물어 먹곤 했다. 배가 고프거나, 한식에 질렸을 때 햄버거가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뭔가 결핍을 느낄 때, 왠지 여유가 없다고 생각될 때, 반사적으로 통통한 고깃덩어리, 노란 치즈,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피클과 겨자의 맛이 어우러진 햄버거가 그리웠다. 그날 내가 만난 최초의 미제이자 미국이었던 햄버거는 수없이 떠다니던 풍선과 크림냄새 나는 종이처럼 여유와 풍요의 상징이었으니까."

박상 - 온몸을 깨우는 매콤함, 빨계떡
"아, 그때였다. 그가 소울푸드를 만난 순간이 온 것이었다 ... 그곳에는 '빨계떡'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는 매콤하고 강렬한 그 냄새에 살짝 가슴이 설렌다는 느낌을 받았다 ... 빨계떡 국물을 한 숟갈 뜨자 예상대로 엄청나게 매워서 혓바닥이 요동했다 ... 그는 정체된 자신을 때려 깨울 수 있는 수단을 발견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흩어지지 않고 한구석에서 곱게 익은 계란 덩어리와 부드러운 떡까지 다 먹고 나자 그는 우렁찬 환희를 느꼈다 ... 그는 좋은 느낌에 도취되어 다다다다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소설은 그의 등단작이 되었다. 빨계떡을 모르고 살아온 지난 날들이 원통할 정도였다."


'그토록 뜨거웠던 순간의 청춘 한 스푼'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챕터에서 저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소울푸드와 함께 추억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소울푸드는 암울한 청춘에게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던 주먹밥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의 친구집에서 실제로 만드는 과자 이브콘이기도 했으며, 현재의 남편이 처음으로 자신과 같이 먹었던 맛있는 피자이기도 하다. 또 이미 헤어진 연인으로 인해 그 특별한 맛을 알게 된 카레였으며, 과거에 가난했던 나라의 순진한 소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풍요와 여유의 상징인 햄버거였고, 거의 반포기 상태였던 작가지망생에게 한 줄기 빛을 선사한 빨계떡의 위용이었다.

이렇듯 소울푸드는 현재 그것을 먹든 먹지 않든, 영원히 우리의 추억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흑인들이 더 이상 백인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노예생활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이 진정한 Blues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성석제 - 영혼의 거처
"이런 저런 모든 설명과 논의를 단숨에 초월해버리는 것은 맛의 깊이였다. 열 길 우물도 아닌데 무슨 깊이가 있겠는가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깊이를 인지하는 것은 바로 내 머릿속에 있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이며 내 어머니의 아득한 조상의 고향. 그분들이 담가먹던 장과 김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내 음식으로 정해져 있었다. 어머니의 태속에서 어머니가 만들고 담그고 짓고 먹는 장과 김치, 밥에 이미 중독이 되어 있었다."

한창훈 - 지금 익숙한 것을 처음 만났을 때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과 절대 안 먹는 것의 공통점은 어렸을 때 자주 먹었다는 것이다. 인이 박혀 안 먹을 수 없다고 하고, 질려서 절대 안 먹는다고도 한다 ... 세상에는 왜 이렇게 먹을 게 여러 가지일까. 닭이나 돼지는 한두 가지로 평생을 살고 물고기도 지렁이나 고동 같은 것만 먹고도 사는데 왜 사람은 못 먹어본 게 이렇게 자꾸 생길까. 그러면서 나는 고민했다. 육지에 나가면 짜장면과 소시지 중에 무엇을 먹어야 할까. 물어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맛있는 것을 동시에 두 개 먹어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창완 - 수제비와 비틀즈
"수제비에 들어가 있는 들깨 냄새가 옛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 비틀즈 판은 계속 돌아갔다. 노래는 늙지 않는다. 종업원이 다가와 물었다.
식사 맛있었어요?
응. 근데 조금 아팠어요.
왜요?
아냐. 맛있어서 그래요.
비틀즈를 들으며 먹은 오늘의 점심식사 수제비는 한 끼니의 식사이기도 하고 내 인생을 들여다보는 핀홀이기도 했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삶은 늘 한끼의 식사일 뿐이다."

이충걸 - 엄마표 된장찌개
"가끔 엄마가 안 계실 때 내 맘대로 된장찌개를 만들기도 한다. 된장이 같은들 엄마의 그 맛이 날 리 없다. 인색하게 말해서 된장찌개인지 두부찌개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하지만 엄마에게 일일이 물어 그 세부를 알고 싶지 않다. 내가 드디어 엄마표 된장찌개의 오묘한 맛까지 터득했다고 생각하면 나를 양육한다는 책임으로부터 편안해질까 봐, 그럼 의욕 하나를 덜어내 어쩜 엄마가 무력해질까 봐."

이우일 - 남쪽 나라에서 온 사나이
"2011년, 여름 ... 화산이씨인 내가 이토록 베트남 쌀국수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남쪽 나라에서 온 나의 조상이 이 맛을 죽는 날까지 그리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하지만 화산이씨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사실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화산이씨의 시조 이용상은 안남국(베트남)의 시조인 교지군왕 이공온의 7세손이며 ... 이용상은 고려 고종 때 본국의 변란을 피해 바다를 건너 동래하여 황해도 옹진의 속진인 화산에 정착했다 ... 옹진에 정착한 이용상은 북면 봉소리 동쪽 원추형 산 위에 쌓은 화산성에 올라가 망국단을 만들고 고국을 그리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마음의 고향, 짭쪼름한 그리움 한 방울'이라는 제목의 두 번째 챕터. 여기에서 소울푸드는 실재 음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어떤 이미지에 가깝다. 단순히 그것을 직접 맛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떤 존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래서 소울푸드는 고향일 수도 있고, 그리운 부모님일 수도 있으며, 그다지 관계가 없어보이는 내력이지만 왠지 신경이 쓰이는 자신의 연고일 수도 있다. 이것은 순전히 정서적인 문제다. 다른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고, 또 억지로 그럴 필요도 별로 없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정확하게 정의 내리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다만, 비슷한 시기와 비슷한 장소를 함께 살아 본 이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게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소울푸드로서의 짜장면이나 소시지, 수제비나 쌀국수에 대한 감정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이것들의 사전적 뜻풀이를 이 자리에서 들먹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뮤지션들이 재즈(Jazz)나 그루브(Groove)를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건 설명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정박미경 - 달밧, 내 영혼의 다이어트
"소박한 달밧(네팔 가정식쯤 되는 음식)을 먹으며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후 절망으로 내몰렸던 상황을 전부 짊어지려 했던 내 작은 어깨의 두려움을, 가족들의 슬픔을 보듬느라 정작 나의 슬픔을 들여다볼 수 없었던 연약한 가슴의 먹먹함을.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틀어질 것 같아 애써 눈물을 삼켜야 했던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나는 울었다. 나는 아버지를 원 없이 그리워하고 아버지 없는 슬픔을 마음껏 토해냈다. 달밧을 먹으며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눈물을 허한 것이다."

김어준 - 라면은 완전식품이다
"이럴수가! 라면이 이런 맛이었던 말이더냐.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격정이 밀려 왔다. 둘을 돌아봤다. 그들 역시 극락에 도달한 접신의 표정. 마지막 국물을 차례로 들이키는 최종 제례를 치르며 우리 셋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카, 으, 아, 허공을 가르는 의성어들. 달걀도, 야채도, 그 어떤 부가 식자재의 도움 없이 오로지 면과 스프만으로 이 경지라니 ... 어떤 것도 첨가해서는 아니 되는, 그런 무례한 일탈은 용납될 수 없는, 오로지 면발과 수프와 물 조절만으로 완성되어 마땅한, 라면이야말로 이 시대의 완전식품이라고. 라면 만세!"

박찬일 - 토스카나의 수프를 추천하네
"토스카나 어디든 서민들의 식당, 트라토리아에 가면 이 요리가 보인다. 막상 시켜 먹어 보면 별 맛도 아닌 무덤덤한 풀죽 같은 요리다. 중세 농노들이나 먹었을 것 같은 수수하고 무심한 맛, 하지만 토스카나 사람들의 핏줄에 타고 흐르는 소울푸드다 ... 한국에서 이 요리를 한 잡지의 요청으로 재현한 적이 있었다 ... 비슷한 맛이 나지 않았다 ... 거칠고 소박하며, 영혼의 기운을 담은 음식은 확실히 기운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공민왕의 도루묵 설화처럼, 시공의 변화는 맛까지 변화시킨다."

노익상 - 퓨전, 길에서 얻은 음식
"다시 길을 나서는 오늘 또 다른 퓨전을 기대하고 있다. 외국 군대 울타리 밖에 버려진 음식에 군내 나는 '지'를 넣고 기름진 밥과 국으로 이끌어 허기를 이긴 할미들이 스승처럼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퓨전의 완결판이라 해도 좋을 그 음식이 궁핍한 시대를 갈음하였다면, 새롭게 등장하는 퓨전 음식이 무엇인지를 챙겨 보는 일은 우리의 현대를 새로운 관점에서 들여다 볼 좋은 기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이들에게 그 음식이 더 당기는가를 살피면, 풀기 어렵게만 보이는 우리네 갈등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든다."

황교익 - 바닷내가 나는 밤이면
"세상은 그런 것이다. 누구든 참고 뛰어야 하는 것. 그러지 않으면 힘들게 뱅뱅 도는 인생에 발목이 잡힌다. 한국 사회에서 자본 계급이 아닌 한 밥벌이의 고통은 거의가 비슷한 무게로 지워져 있는 것이다. 경의선 막차의 객실 안에는 온갖 냄새가 진동한다. 서울에서 밥벌이하면서 먹었던 것들의 냄새다. 비릿한 삼겹살 냄새, 달착지근한 돼지갈비 냄새가 가장 많다. 이 여러 냄새 중에 가끔씩 바다의 냄새를 맡을 때가 있다. 아주 먼 바다 냄새다. 누군가 해산물을 내는 식당에서 묻혀 왔을 것이다 ... 경의선 객차에서 바닷내가 나는 밤이면, 기차가 수십억 년 전 지구가 탄생할 때의 그 고요를 담고 북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환상을 만든다. 거기 가서, 굶주림의 동포들에게 소울푸드를 묻는 만행은 하지 못할 것이다, 차마."

'낯선 길 위에서 건져낸 삶의 의미 한 움큼'이라는 제목의 세 번째 챕터에서 작가들은 소울푸드를 통해 형이상학적인 인생의 의미를 추출해낸다. 이들은 히말라야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던 트라우마와 맞닥뜨리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끓여 먹은 라면을 통해 달관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며, 우연히 이탈리아의 음식을 배우다가 자신의 소울푸드뿐만 아니라 모든 특별한 음식에 적용되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소울푸드에서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그림자,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는 작가들은, 음식으로부터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삶에의 의지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다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이는 싸구려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도 진실한 고민을 하는 반면, 또 다른 이는 아무리 값비싼 만찬을 먹더라도 타성에 젖어 의미 없는 반복에만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다. 이것이 바로 Soul의 유무에서 나타나는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이지민 - 커피향 엄마를 기억하세요?
"이제야 나는 그 풍경의 진실이 보인다. 엄마가 그토록 맛있게 먹던 달달한 커피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서류 더미와 이른 아침의 밥냄새가 어떤 의미인지. 감옥에 가 있는 남편을 대신해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여성학자가 아이들이 깨기 전에 밥을 짓고, 책을 읽고, 일을 마치는 그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의 유일한 위로가 그 한 잔의 커피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가장 근사하게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실은 매일 새벽 용기를 내서 주먹을 쥐며 일어나야 했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가난한 시절을 보내던 젊은 엄마의 슬픈 초상이었던 것이다."

조동섭 - 커피, 벗어날 수 없는
"그해 제야. 집에는 우리 둘뿐이었지. 두 달 뒤면 고3이 될 아들을 온천여행에 데려갈 부모는 없을 테니까. 식구들은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와 있는 것만으로 오히려 더 즐거웠어. 1월 1일 0시. 백남준이 1984년을 축하했어.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울긋불긋한 화면을 바라보았지. 그리고 입을 맞췄어. 머릿속에 백남준의 비디오 쇼가 터지는 것 같았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온몸이 덜덜 떨렸지. 커피에 취했듯, 그렇게. 그래, 그 겨울."

차유진 - 혼자 마시는 술
"엄마가 소주 첫 잔을 급하게 털어 넣고 한숨을 푸욱 쉬는 동안 난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인 민물 참게장 그릇의 뚜껑을 열어놓았다. 그렇게 엄마가 소주 한 잔을 새로 따르고, 게를 맛있게 와삭와삭 씹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때 소주 한 잔 하고 내쉬는 한숨소리가 안타까우면서도 어찌나 시원하게 들렸던지. 살 것 같다, 시원하다는 느낌을 어른이 되면 언제 배울 수 있으려나 마냥 궁금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술 한 잔이면 하루가 그럭저럭 마무리될 수 있나보다, 란 생각에 어서 어른이 되어 그 맛을 보고 싶었다."

남무성 - 재즈, 와인 그리고 박사님
"박사의 말처럼 와인을 마시는 데에는 필요한 게 많겠지만 때로는 그것이 불필요한 것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과 함께 즐기는 그 시간이었다. 서귀포의 멍게와 와인도 그가 내게 베푼 최선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때 우리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와인잔의 부담스러움이란 자칫 깨어지기 쉽다는 이유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불편한 술은 소주잔 부딪치듯 우렁찬 건배도 맘 편히 할 수가 없다. 대신 부드럽고 섬세하게 우리들의 관계를 기억하게 해준다. 내게는 그 시간이 바로 일상에서 떠나는 특별한 여행이다."

강병인 - 삶이 담긴 술잔
"선생님의 기분을 좋게 만든 것은 제자의 행동 때문이었을까, 술이 맛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술은 무슨 맛인지, 어른들은 왜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술을 마시는지. 소년은 그저 서울의 술을 선생님께 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그 후 진로라는 회사는 성인으로 성장하면서도 늘 뇌리에 박혀 있는 회사가 되었다 ... 김인수 담임선생님.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선생님. 서울의 추억을 선물해주셨고 나의 운명을 결정지어주셨다. 선생님의 권유로 서예를 시작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제법 재주가 있어서 글씨를 잘 썼고, 학교 대표로 서예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붓을 내 몸과 떼어놓은 적이 없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이자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캘리그래퍼 강병인을 있게 한 운명의 시간이었다."

'내 몸에 흐르는 달콤쌉사래한 추억 한 모금'이라는 제목의 네 번째 챕터이다. 여기에서 소울푸드는 저자 인생의 결정적인 관계와 그 기억을 대변한다. 근사하게 커피를 마시던 어머니, 커피와 함께했던 동성의 연인, 소주 한 잔으로 한숨을 달래던 엄마, 와인을 통해 서로를 배려했던 오래된 친구, 술로 운명적인 인연을 보여줬던 어린 날의 선생님. 누구에게나 삶은 인간관계의 연속이고, 소울푸드를 매개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자신이 다시 한 번 만난다. 소울푸드는 그것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이를 함께 나눴던 다른 사람과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지금 이 자리에 그렇게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소울푸드는 한 인간의 역사이자 문화이며, 영혼의 기록이다. 우리는 자신의 소울푸드를 통해, 만고불변의 진리인 '너 자신을 알라'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며 인생에서의 운명적인 만남도 스스로 증명해볼 수 있는 셈이다.


소울푸드 - 10점
김어준, 성석제, 김창완 외 지음/청어람미디어


이렇게 [소울푸드]라는 책을 읽으면서, 과연 나만의 소울푸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음식이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이 글을 읽은 다른 많은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우여곡절이 많았든 아니든, 풍족했든 그렇지 않든, 주변에 사람이 많았거나 적었거나,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각자 자신만의 소울푸드가 적어도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 소울푸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건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스물 한 명의 작가들이 위에서 그대로 그걸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라면일 수도 있고 과자일 수도 있으며, 커피나 술일 수도 있다. 한국사람이라면 매일 먹는 것일 수도 있고, 한국인 중에 단 1%도 먹어보지 못한 먼 나라의 음식일 수도 있다.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보다, 그걸 통해 우리는 그리고 나는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떻게 마음을 채웠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흔한 음식 몇 가지가 생각이 났는데, 누가 뭐래도 이것들은 나만의 소울푸드인 것이다. 흑인이 자신들의 Soul music을 들으며 고단한 삶의 위로를 받았듯이, 나 역시 이런 소울푸드를 통해 영혼의 포만감을 느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인간은 지속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언제나 소울푸드는 극히 주관적인 자신만의 처방전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 음식이라는 분명한 형태를 갖고 있기에 이걸 아는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공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청어람미디어의 [소울푸드]라는 책의 존재 이유이자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소울푸드 리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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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소울뮤직과 소울푸드의 원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 국내작가 21인이 말하는 한국인의 소울푸드에 대해서도 살펴봤으며, 그 와중에 'The Queen of Soul' 아레사 프랭클린의 걸작 'Chain of Fools'도 함께 들어봤다.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소울푸드]. 우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굳이 설명하거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소울푸드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또 편하게 얘기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쓴 것처럼, 소울푸드는 항상 자기 내면의 솔직한 표상이 될 수 있으며 누군가의 인생을 지탱해주는 소중한 버팀목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먹고 마시는 일은 참 중요하다. 그리고 소울푸드는 먹고 마시는 일일 뿐만 아니라, 추억하고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상 생활의 핵심이면서 또한 철학적인 행위인 것이다. 우리네 인생에서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지금까지 소울푸드를 생각해 보았으니, 이젠 나만의 소울뮤직도 한 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Soul music을 듣는 동시에 Soul food를 함께 먹어보자.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