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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 α

사르트르가 말한 [베네치아의 유폐자] 틴토레토, 그리고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세 거장.

 

르네상스를 얘기할 때는 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가 있었던 피렌체를 많이 다루는데, 16세기에는 그에  버금가는 이탈리아 미술의 또 하나의 중심지 베네치아도 중요한 것 같다. 피렌체에 완전한 화면구성과 균형잡힌 구도가 있다면, 베네치아에는 찬란한 빛과 풍요로운 색체가 있다. 피렌체에 위의 세 사람이 있었다면,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 틴토레토(Tintoretto, Jacopo Comin, Jacopo Robusti, 1518~1594),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Paolo Caliari, 1528~1588)가 있었다.

 

피렌체의 그들에 비해 베네치아의 세 거장은 상대적으로 좀 덜 알려진 듯한데, 프랑스의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자신의 저서 [상황 IV: 초상]에서 틴토레토와 그 시기 베네치아를 특별히 다루고 있다. 틴토레토를 제외하면 이 책의 다른 글은 모두 사르트르와 동시대인들에 대한 것인데, 한국에는 [시대의 초상-사르트르가 만난 전환기의 사람들]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틴토레토 부분은 '베네치아의 유폐자'라는 제목으로 쓰였으며, 틴토레토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그리고 16세기 베네치아라는 도시 자체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들여서 서술하고 있는데, 솔직히 그리 쉬운 글은 아닌 듯하다.

 

아무튼 16세기의 역사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은데, 이 시기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하던 때였다. 역사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점점 옮겨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도 경제적, 문화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시민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비엔나의 베토벤처럼, 운 좋은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베네치아에는 틴토레토보다 한 세대 앞서 태어난 티치아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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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베첼리오, 그는 베네치아 출신은 아니었지만 베네치아에서 주로 활동했고, '회화의 군주'라고 불릴 정도로 베네치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화가였다. 그는 베네치아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변화의 조짐이 닥치기 전에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이 도시의 스승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며, 베네치아에 몰락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뒤였다. 그리고 긴 생애 동안에 그는 미켈란젤로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작은 별들 가운데의 태양'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왼쪽: 티치아노, [성모의 승천], 1518년. 제단화, 686 x 361 cm, 베네치아 산타마리아데이프라리성당
오른쪽: 티치아노, [황제 카를 5세의 기마상], 1548년. 유화, 279 x 332 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또한 티치아노는, 당시 유럽 최고의 권력자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조차 그가 떨어트린 붓을 집어주며 경의를 표했다는 말이 전해지듯, 수많은 군주와 귀족 그리고 교황과 베네치아 총독의 초상화를 그리며 '궁정화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와 관련해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베네치아공화국은 위엄에 굶주려 있었다. 선박들은 오랫동안 그 영광을 일구었다. 지치고 조금은 쇠퇴한 그 공화국은 한 명의 예술가로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티치아노는 그 혼자만으로도 함대에 버금갔던 것이다. 그는 교황의 삼중관과 왕관으로부터 불꽃을 가져다가 자신의 월계관을 엮어냈다. 티치아노가 귀화한 베네치아는 무엇보다도 그가 황제에게 불러일으킨 존경심에 감탄했다... 왕들의 화가는 화가들의 왕일 따름이었다. 바다의 여왕인 베네치아는 티치아노를 자기 아들로 여겼고 그 덕분에 조금은 위엄을 되찾았다... 티치아노는 국가의 재산이었다. 게다가 이 남자는 나무들처럼 장수하여 한 세기를 지속하더니 서서히 하나의 구성체처럼 변형되었다. 단 한 명으로 구성된 이 아카데미의 현존은 젊은이들보다 먼저 태어났음에도 그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로 작정하며 젊은이들의 기를 꺾었다."

티치아노는 말 그대로 군림했던 것이다. 게다가, 곰브리치가 그의 저서 '서양미술사'에서 말했듯이, 그 무렵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피렌체의 세 거장과 베네치아의 티치아노는 그 전 세대가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해낼 만큼 천재적인 화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몇 백 년이 지난 지금에 봐도 그들의 작품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때 사람들이 왜 안 그랬겠는가? 하지만, 역시 "장차 위대한 미술가가 되고자 하는 소년에게 그 당시의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는 결코 듣기에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었을" 테고, 거기에 바로 '베네치아의 유폐자' 틴토레토가 있었다.

1518년생인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와는 달리 베네치아 출신이었다. 1530년 즈음, 티치아노의 작업실에 견습생 자격으로 들어갔지만, 이 저명한 화가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 소년을 문밖으로 쫓아냈다고 한다. 요즘도 그렇지만, 티치아노와 같은 절대적인 권위자에게 쫓겨난 틴토레토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 소년은 거기서 끝장나지 않았다. 티치아노가 그를 쫓아낸 명확한 이유를 지금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틴토레토가 어떻게 이 좌절을 견뎌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틴토레토는 어쨌든 그 시간을 극복했고, 1539년부터 독립적인 화가로 활동하며 나름의 명성과 고객을 확보한다.

왼쪽: 틴토레토, [성 마가의 기적], 1548년. 416 x 544 cm, 베네치아 아카데미아갤러리
오른쪽: 틴토레토,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1555년경. 157 x 100 cm, 런던 국립미술관


이때, 파올로 베로네세는 갓 열 살이 넘었고 티치아노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출생년도가 확실치 않다)였는데 비해, 틴토레토는 막 이십 대가 된 한창 때의 젊은이였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린이와 곧이어 사라질 것이 분명한 노인 사이에 훌륭한 화가들은 많았지만, 틴토레토만이 유일하게 앞으로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을 기약한다. 어쨌든 그의 세대에는 경쟁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유로웠다. 실제로 그는 몇 년간 더 질주를 계속한다. 주문이 쇄도하고 대중의 호의를 얻어낸다."

 

 

하지만 '군주의 화가' 티치아노는 장수했고, 자신의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정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베로네세였고, 틴토레토는 또다시 시련을 맛보게 된다. 후계자 베로네세는 티치아노와 같이, 베네치아 출신이 아니었지만 주로 이 곳에서 활동했다. 강렬한 명암 대비,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 원근법과 단축법을 드라마틱하게 사용했던 틴토레토에 반해, 베로네세는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아 아름다운 구도, 장엄하고 화려한 채색,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공간 구성을 보여주며 '베네치아파'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

 

왼쪽: 베로네세, [가나의 혼례], 1563년. 667 x 994 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오른쪽: 베로네세, [레팡트 전투], 1582년. 285 x 565 cm, 베네치아 두칼레궁


티치아노로부터 쫓겨난 이력이 있는 틴토레토. 티치아노로부터 후계자로 지목 받은 베로네세. 게다가 오랫동안 생존해 온갖 영광를 누렸던 티치아노. 베네치아의 선택은 이미 결정난 거나 다름없었다. 틴토레토가 자신과 피로 맺어진 고향인 베네치아를 절대 떠나지 않고, 아무리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려내며 낮은 가격으로 판매를 해도 그는 상황을 바꿀 수 없었다. 더군다나 군주나 귀족의 후원을 받았던 티치아노와는 달리, 부르주아들인 평민 동업자 단체의 그림을 많이 그렸던 틴토레토에게는 적들과 자신의 간극이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급기야 틴토레토의 열정은 일종의 분노로 변했다. 스케치를 요구하는 이에게 아예 유화를 완성해 기증까지 해가며 부도덕하게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심지어는 표절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런 틴토레토와 베네치아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틴토레토는 전복된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네치아의 불안을 들이마셨고, 그 불안은 그를 잠식시켰고, 그는 오로지 그것밖에 그릴 줄 몰랐다... 틴토레토의 불행은 스스로를 인지하기를 거부한 한 시대의 증인이 되는 일에 자기도 모르게 헌신했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운명의 의미와 베네치아 사람들의 원한의 비밀을 단번에 발견하게 될 것이다. 틴토레토는 모든 사람을 불쾌하게 했다. 귀족들은 그가 부르주아의 청교도주의와 몽상적 동요를 드러내주었기 때문에 불쾌해했다. 장인들은 그가 동업조합의 질서를 파괴하고, 명백한 직업적 연대 밑에 경쟁심과 증오심이 들끓고 있음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에 불쾌해했다. 애국적 시민들은 회화의 불안과 신의 부재로 인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베네치아의 죽음도 일어날 수 있는 부조리하고 우연으로 가득한 세계의 발견을 그의 붓끝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불쾌해했다. 부르주아로 변화한 이 작가가 적어도 자기가 귀화한 계급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겠느냐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니다! 부르주아가 그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부르주아들을 매혹했지만 자주 그들을 두렵게 했던 것이다. 부르주아들은 자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1594년. 유화, 366 x 569 cm, 베네치아 성조르조 마지오레교회

틴토레토는 부르주아들이 아직 자의식을 갖기도 전에, 스스로 부르주아로 살아갔으며 그런 부르주아 계급의 취향과 입장을 드러냈다. 몰락해가는 귀족공화국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한 베네치아의 귀족들은 '군주에 대한 공손한 사랑'을 가지고 있던 티치아노와 달리, 틴토레토의 그림은 불편했을 것이다. 아름다움보다는 극적 긴장감을, 원숙한 조화보다는 고조된 흥분을 표현했던 틴토레토의 화풍은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주도적인 위치를 서서히 잃어가던 베네치아 시민들에게 안정감보다는 불안감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실상 절망적인 두려움에 빠져있던 베네치아는 틴토레토와 같은 존재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듯하고, 결국 그를 저주하고 말았던 것 같다.

"베네치아는 불안증을 가진 사람을 하나 만들어내어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의 불안을 저주했다. 그 불행한 사람은, 절망하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한 도시를 절망적으로 사랑했다...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와 세상의 장례를 집도했다... 그 도시와 화가는 단 하나의 동일한 얼굴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