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에두아르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역사화는 실제로 일어났거나 신화, 성서의 내용처럼 사람들이 일어났다고 믿는 사건을 그린 그림이다. 초상화나 정물화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역사화는 서사적인 그림이며, 역사적으로 정말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것을 그린 것이기에 화가의 정치적인 성향이 작품에 드러나기도 한다. (비교적) 사건을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특성이 강한 사진에 반해 역사화는 화가가 인물의 특성이나 세부적인 배경 등을 자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고, 게다가 사진은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에서 사진가가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것인데 비해 역사화는 사건의 현재성과는 무관하게 화가가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화가의 입장이라는 것이 그대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왼쪽부터 프란시스코 고야, 에두아르 마네, 파블로 피카소]
여기 위대한 화가 세 사람이 있다. 그들은 바로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그리고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이다. '마지막 고전적 대가이자 첫 번째 근대적 화가'로 불리는 Francisco Goya는 1814년에 역사화의 걸작 [1808년 5월 3일(El tres de mayo de 1808 en Madrid, The Third of May 1808)]을 남겼다. 이 그림에 영감을 받은 '인상주의의 아버지' Édouard Manet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Exécution de l'Empereur Maximilien du Mexiqu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8)]을 그리게 된다. 또 1951년에는 '현대 미술의 창시자'인 Pablo Picasso가 고야와 마네의 그림을 참조해서 한국전쟁에 대한 역사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 Massacre in Korea)]을 그렸다.
서양 미술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세 화가의 작품 세 점이 '역사화'로 한꺼번에 묶이는 것이며, 이 그림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서로를 연상시킬 정도로 비슷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포스트에서는 근대적 화가의 시작이었던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 (1814)', 인상주의 화가의 시작이었던 마네의 역사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8)', 현대 미술가의 시작이었던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 (1951)'을 모두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다른 두 작품의 본보기가 되었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역사화 [1808년 5월 3일(El tres de mayo de 1808 en Madrid, The Third of May 1808, 1814)]부터 보도록 하자.
고야(Goya), [1808년 5월 3일], 1814. 캔버스에 유채, 266 x 345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프란시스코 고야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를 대표하는 스페인 화가이고, 80여 년이 넘는 긴 세월을 살면서 다양한 주제를 가진 여러 장르의 유화와 판화, 드로잉을 남겼다. 무려 2000여 점에 달하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각종 미술 사조와 작품의 톤, 사회적인 메시지 등의 관점에서 아주 변화무쌍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인생역정만큼이나 무척 복잡다단한 양상을 드러낸다.
후세 사람들은 Goya의 전체 생애와 작품을 보면서 도대체 그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상당히 혼란스러워 할 정도이고, 어느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 고야의 삶과 예술은 너무나 급격한 역사적 변동을 겪은 그의 시대처럼 여러 가지 해석을 낳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갑작스럽게 고전적 대가의 마지막이 되었고 자기도 모르게 최초의 근대적 화가가 되었던 Francisco Goya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역사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주제로 보는 명화의 세계 - 앨릭잰더 스터지스 책임편집, 홀리스 클레이슨 편집자문, 권영진 옮김/마로니에북스 |
아무튼, 지금도 여전히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 이 화가의 그림들 중에서 명실상부한 대표적 역사화가 하나 있다. 이것은 1808년 5월 3일에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Napoleon I)의 프랑스 군대와 스페인 민중 사이의 역사적 사건을 그린 작품인데, 바로 그 전날의 모습을 그린 [1808년 5월 2일(El dos de mayo de 1808 en Madrid, The Second of May 1808, 1814)]과 한 쌍을 이루는 그림이다.
고야(Goya), [1808년 5월 2일], 1814. 캔버스에 유채, 266 x 345cm,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우선 5월 2일에는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 점령군에 대항하는 민중 봉기를 일으켰고, 사건이 일어난 지 6년 뒤에 Francisco Goya는 이들의 싸움을 역동적인 한 폭의 그림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그다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아마도 다른 고전적인 역사화와 그리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을 그렸던 1814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현재에 와서는 여타의 많은 고전 역사화들과 비교해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5월 3일의 대규모 총살을 그린 그림은 달랐다. '1808년 5월 2일'과는 달리, '1808년 5월 3일'은 민중의 항거와 권력의 학살에 대한 원형적인 이미지로서 대단히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El tres de mayo de 1808 en Madrid(The Third of May 1808)]는 총살이 집행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어제의 민중 봉기에 대한 보복의 의미일 것이며, 피를 흘리며 고꾸라져 있는 희생자와 끔찍한 공포에 질린 채 죽음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얼굴을 통해 그 비극적 결말을 우리 앞에 그대로 보여준다. 학살을 저지르는 군인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으며, 그림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사선으로 서있는 그들은 마치 기계처럼 보인다. 커다란 등불은 흰 옷을 입은 사나이를 밝게 비추고 있는데, 양쪽으로 두 팔을 벌린 그는 예수를 연상시키는 듯하며, 무자비한 폭력 앞에 선 극도의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성을 상실한 살인자들과 고통스런 죽음을 피할 길 없는 시민들. 여기에서는 고전적인 영웅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어리석은 광기와 역사의 암담한 현실뿐이고, 밝은 곳에서 학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뒤쪽의 어두운 도시는 잠들어 있다. 이 얼마나 잔혹하고,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인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1808년 5월 3일]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작품에 반영하는 한편, 우리를 비참한 역사의 현장에 그대로 동참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Goya의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의 역사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Exécution de l'Empereur Maximilien du Mexiqu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8)]을 살펴 보자.
마네(Manet),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8. 252 x 305cm, 캔버스에 유채, 만하임 쿤스트할레
"1864년 멕시코를 점령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 직접적으로 군사를 개입시키기 위하여 젊은 막시밀리안 대공을 황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내전 상황이 계속되면서 프랑스군은 철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고립된 막시밀리안 황제는 결국 1867년 6월 7일 후아레스의 자유주의 정부에 의해 두 명의 장군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 작품은 이 내용을 그린 것으로, 에두아르 마네는 배경을 달리하여 총 4작품을 제작했는데, 다른 버전으로는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대신, 담 너머로 총살 장면을 구경하는 구경꾼들을 묘사한 작품이 있으며, 이는 현재 독일의 바덴바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네이버 미술검색, 작품 해설 중에서 -
1867년, 프랑스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는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보도한 신문 기사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처형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기도 전에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군대의 유력한 인사였던 친구에게 부탁해서 한 소총부대에게 포즈를 취하도록 요청했다. Édouard Manet는 이 그림을 통해 막시밀리안의 죽음에는 프랑스 정부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는데, 고야가 나폴레옹 1세를 비판했듯이, 마네도 [Exécution de l'Empereur Maximilien du Mexique(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를 통해 나폴레옹 3세(Louis-Napoléon Bonaparte, Napoleon III)를 냉정하게 정치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역사화에 대한 영웅적인 해석을 의도적으로 허물려고 했던 Manet는 1865년에 Goya의 [1808년 5월 3일]을 처음 보고 큰 감동을 받았고, 이를 참조해서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실제 처형 장면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마네의 이 작품을 보고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이렇게 경의를 표했다. "이것은 순수하게 고야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마네 자신이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다리 같은 존재인 마네가 실제 사진을 보기도 전에 고야의 그림을 바탕으로 머릿속으로 구상했기에,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에 대한 [1808년 5월 3일]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 세 번째로, Goya와 Manet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역사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 Massacre in Korea, 1951)]을 보자.
피카소(Picasso), [한국에서의 학살], 1951. 110 x 210cm, 패널에 유채, 파리 피카소미술관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6.25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은가. 말 그대로 한국전의 참상이고, 현대의 역사화다. 고야나 마네의 그림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왼쪽의 무력한 약자들과 오른쪽의 비인간적인 살해범들.. 피카소는 한국에 와본 적이 없지만, 1930년대 자신의 모국인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에 비춰서, 동족간 전쟁의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에게 무시무시한 총을 겨누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저 전쟁의 잔혹함 자체를 드러냈다고 봐도 될 듯하고, Picasso가 전반적인 구도는 Goya의 그림에서 따왔다면, 맨 오른쪽의 칼을 든 야만인은 Manet의 그림을 참조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첫 번째 현대 화가 Pablo Picasso는 역사화의 영원한 주제인 전쟁에 대한 분노와 항의의 작품을, 최초의 근대적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과 사실주의자이면서 인상주의의 아버지인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바탕으로 해서 이렇게 그렸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계속해서 발생한 것과 같이, 예술가들은 그에 대한 비판을 끊임없이 해왔고 앞으로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Goya가 했고, Manet도 했으며, Picasso 역시 했던 것처럼..
이상으로,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작품 [1808년 5월 3일(El tres de mayo de 1808 en Madrid, The Third of May 1808, 1814)]을 보고 그린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의 그림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Exécution de l'Empereur Maximilien du Mexiqu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8)], 그리고 고야와 마네의 작품을 보고 그린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역사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 Massacre in Korea, 1951)]까지 다 정리해 보았다. 만약 마네가 고야의 그림을 보지 못했다면, 과연 자신의 작품을 그렇게 그렸을까? 또 피카소는?
언제나 그렇듯,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는 미래를 변화시킨다. 아마 그것이 고야가 역사화를 그린 이유이며, 마네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 이유이기도 하고, 피카소가 우리에게 그림을 보여준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쨌든 정치적인 존재가 결국에는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금의 한국에서도 말이다.
우리 시대 같은 때에 (정치적인) 그런 주제를 피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보기엔 난센스다.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그런 주제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그저 어느 쪽을 편들고 어떤 접근법을 따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 조지 오웰(George Orwell, Eric Arthur Blair, 1903~1950)의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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