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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을 순 없지만 진실한 유머 모음, 천명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때늦은 함박눈으로 시작해 벚꽃 구경으로 끝나는 소설집, 우리 현실 속의 춘래불사춘.

 

천명관의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가 출판사 창비에서 출간됐다. 원래 '픽션' 서적에 대한 출판사의 책 소개를 다 읽는 편은 아닌데, 이번에는 어쩌다가 전문을 찾아 읽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유머'라는 설명 뒤에는 언제나 그렇듯 '위로'와 '감동'이라는 단어가 클리셰처럼 따라붙는다. 이상하게 한국의 출판사나 영화사들은 유머에다가 자꾸 뭔가를 더 갖다붙이려고 든다. 코미디 영화의 엔딩에 난데없이 감동 코드를 집어넣고, 홍보의 포인트도 매번 '웃음과 감동'이란다. 그냥 신나게 웃기만 하다가, 책이나 영화가 끝나면 아무 생각 없이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면 안 되나?

 

왠지, 창비의 책 소개가 마음에 안 들었다. 영화사나 출판사들은 유머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장사'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아니면, 뭔가 자꾸 의미 부여를 해야 자신들의 일이 어떻게든 좀 더 고상해진다고 여기든지. 아무튼 이런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을 읽었는데, 이게 웬걸? 처음부터 끝까지 8편을 다 읽는 동안에 거의 웃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90년 전에 현진건이 "왜 먹지를 못하니?"라고 울부짖은 이래, 천명관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왜 웃지를 못하니?"라고 소리치게 된 것이다. 창비는 이게 유머라는데, 굳이 따지자면 블랙 코미디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웃을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면서 유머 · 위로 · 감동을 모두 느끼기는 그리 쉽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따뜻한 유머' · '청량한 위로' · '먹먹한 감동' 따위의 표현을 남발한다면, 참 무신경하고 스테레오타입의 설명이라고 느껴지지 않을까? 천명관의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 대한 창비의 책 소개가 딱 그랬다. 현진건은 광복도 되기 전에 죽었으니 자신의 대표작에 관한 이런 설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 수 없지만, 천명관은 요즘 한창 활동하는 작가니까 직접 만나서 한 번 물어볼 수도 있겠다. 아울러,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좋아하는지도 물어보고.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지은이) | 창비 | 2014-08 | 224쪽(반양장본)

 

봄, 사자(死者)의 서(書) -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동백꽃 - 문학과사회, 2013년 겨울호
왕들의 무덤 - 문예중앙, 2010년 겨울호
파충류의 밤 - 문학동네, 2013년 가을호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 자음과모음, 2013년 여름호
전원교향곡 - 문학사상, 2011년 11월호
핑크 - 문학사상, 2014년 6월호
우이동의 봄 - 실천문학, 2012년 여름호

 

이제 본격적으로 천명관 소설집에 담긴 8편에 대해 얘기해 보자.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봄으로 시작해서 봄으로 끝난다. 어차피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것이라면 그 순서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민이 있었을 텐데, 때늦은 함박눈(봄, 사자의 서)으로 시작해서 다시 벚꽃 구경(우이동의 봄)으로 끝나는 목차는 썩 잘 구성한 듯싶다. 그리고 또 하나, 표제작으로 선정된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도 적당히 흥미를 유발하는 책 제목으로 안성맞춤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이해가 잘 되지만, 그냥 제목만 놓고 보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궁금증이 생기고, 마치 박민규 소설의 한 문장 같기도 하다.

 

 

봄, 사자(死者)의 서(書)

요즘은 뉴스에도 잘 나오지 않는, 어느새 흔해져 버린 한 중년 남성의 객사에 관한 이야기다. 자살과 산업재해로만 매일같이 50여 명이 죽어나가는 대한민국에서는 "삼년 전 실직한 이후 가족과 떨어져 혼자 고시원에서 생활해오던 중 술에 취해 공원에서 잠이 들었다 급격한 기온 하락으로" 동사한 오십대 남자에게 기울일 관심 따위는 아예 남아 있는 않은 것이다. 봄이긴 한데 때늦은 함박눈이 내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死者에게서 흉노의 땅에 끌려간 왕소군의 슬픔이 느껴진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동백꽃

한국문학에서 서민적 해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김유정의 1936년 단편소설 [동백꽃]에 대한 오마주가 보이는 작품인데,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김유정의 이야기를 그대로 한 40년쯤 뒤로 가져오면 바로 천명관의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의 [동백꽃]

 

"그저 열에 달떠 동엽의 목을 힘껏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 바람에 동엽의 몸뚱이와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빨간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유자는 땅이 꺼지는 듯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천명관의 [동백꽃]

 

왕들의 무덤

중년 여류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결핍상태에서의 섹스와 과유불급 속에서의 무료한 일탈을 다룬 작품이다. 박정희 시절에 시골 중학교를 다니던 천둥벌거숭이 여자애가 나중에 유명작가가 되면서 육십오평 아파트의 서재에서 에스쁘레소를 우아하게 마시며 맥북으로 이메일을 확인하는 신분상승의 오르가즘. 그러나, 군사독재 이후 지금도 여전히 한국 사회 자체가 부조리한 뒤틀림의 기반 위에 서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안팎에서 과거의 트라우마와 거짓된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아온 여류작가는 하루 하루 시들어가는 육체와 일상의 권태로움에 처박혀 불행하다. 소설 곳곳에서 실제 천명관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해피엔딩에 가깝게 끝난다.

 

파충류의 밤

자살과 실종처럼 이제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흔한 불면증과 소화불량과 두통과 불감증에 대한 이야기다. 수면제와 소화제와 진통제와 비아그라를 통해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화학적 인생'은 우리의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대변한다. 가정의학과와 신경과와 정신과를 부유하는, 출판사 편집 일을 이십 년 가까이 해온 미혼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오래 전 낙태한 경험이 있고, 아파트를 팔아서까지 1년이 넘는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 결국엔 돌아버리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로 끝날 것만 같은 극심한 불면증을 겪으며 어느 연립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리고 낙태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비슷한 또래였을 한 아이, 그러니까 "도대체 얼마나 세게 머리를 부딪쳐야 저렇게 커다란 멍이 생기는 걸까?"라는 물음이 저절로 생기는, 우울하고 공격적인 남자애와 마주친다. 이쯤 되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다 용서가 되지 않나? 이 작품도 어쨌든 해피엔딩이니까 겁먹지 말고 꼭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 10점
천명관 지음/창비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열 두 글자 제목 안에 이 소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그래, 까짓것. 거칠게 한판 살다 가는 거다. 인생 뭐 있나? 백반 좀 먹고 빠구리 좀 치다 가면 그뿐이지."

 

남은 인생에서 뭐 하나 기대할 것 없는 가난한 쉰일곱 말년의 육체노동자는 왜 남의 트럭을 훔쳐 타고 엑셀러레이터를 밟게 됐을까? 먹을 줄도 모르는 냉동 칠면조 고기를 조수석에 싣고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신나게 달리는 트럭은 이 남자에게 앞으로의 인생에서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일말의 희망조차 원천적으로 없애버리는 종말의 트럭이고, 절대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할 망각의 트럭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칠면조는 바로 늙고 골병든 육체노동자이며, 고용과 실직의 무한반복 속에서 일용직 노동자의 불안은 바로 우리 비정규직 삼포세대의 공포다. 그래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가 우리 미래의 모습이기에..

 

전원교향곡

천명관의 소설집을 읽다 보면, 자꾸 일제식민지 시대 한국 문학이 떠오른다. 그래서 이 글도 처음부터 현진건이니 김유정이니 하면서 내용을 채워온 것이다. 이 작품도 그러한데, 전원교향곡을 읽고 나서는 자기도 모르게 최서해의 1927년 단편소설 [홍염]이 생각나는 이들이 많을 듯싶다. 무엇보다 주인공 남자의 극단적 행동으로 끝맺는 결말이 유사하고, 아내나 아이에 관한 상황 설정이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좀 비약인지도 모르겠지만, 한창 활발히 활동하는 소설가에게서 이런 작품들이 나왔다는 건, 어쩌면 현재의 우리 사회가 일제시대 식민지 수탈과 유사한 측면이 상당 부분 있다는 뜻 아닐까? 현진건이나 최서해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아마 천명관의 이 소설들과 비슷한 작품을 썼을 것이다.

 

핑크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이 돋보이는 소설인데, [전원교향곡]과 함께 사실성보다는 상대적으로 극단성이 좀 더 강한 작품이다. 어떤 이들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 실린 8편의 단편이 전반적으로 다 극단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테지만, 비정규직 3포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다. 연애 · 결혼 · 출산 포기에도 모자라 인간관계와 내집마련까지 놓아버린 5포세대는 [전원교향곡]과 [핑크]의 드라마틱한 결말을 제외하면, 나머지 6편은 그다지 내 얘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도한 노동시간 동안 열정을 싼값에 착취 당하는 게 일상이 된 한국 사회에서 앞으로 몇십 년을 비정규직 5포세대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는, 천명관의 유머를 읽으며 절대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셈이다.

우이동의 봄

초봄에 동사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여러 계절을 거쳐 다시 벚꽃 피는 봄으로 돌아왔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웃을 수 없는 유머에 대한 정신적 피로감을 작가가 배려해 주는 것일까?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은 앞선 소설들에 비해서는 꽤 부드러운 편이다. 마치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엔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고 아무 생각 없이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작품에서도 직접 대사로 등장한다. "얘야, 잊지 마라. 사는 건 누구나 다 매한가지란다. 그러니 딱히 억울해할 일도 없고 유난 떨 일도 없단다." 창비의 책 소개에 나온 따뜻한 유머 · 청량한 위로 · 먹먹한 감동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천명관의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는 결국 이렇게 얘기하며 끝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읽었을 때와 유사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천명관은 최서해의 [홍염] 같은 일제시대 단편소설들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고 멋대로 생각하기도 했고, 나이나 성별 · 구체적으로 처한 상황 등은 다르겠지만 각 작품의 주인공들에게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발견할 많은 독자들을 떠올리혼자서 무한한 연대의식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동백꽃] 외에는 거의 웃지 못했지만 그래도 8편 모두 재미있게 읽었고, 또 주변의 누군가와 똑같이 닮은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아프게도 읽었다.

 

천명관의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는 우리 모두의 현실 속 춘래불사춘을 그렸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유머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식민지시대 한국 소설들을 보며 아무리 희극적인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대한민국의 팍팍하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 단순히 판에 박힌 감상만 할 순 없는 것이다. 일부러 웃으려 하지 말고, 애써 위로 받으려 하지 말고, 억지로 감동 받지도 말자. "바보 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천명관의 소설을 그렇게 읽을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삶의 진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찰리 채플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