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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투명인간], 베이비붐 세대에게 바치는 엘레지 그리고 배턴터치 선언

역사 속 베이비부머를 향해 담담한 노래를 부르다, 성석제 장편소설 [투명인간].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는,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중반까지 약 10여 년 동안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70~90년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의 주역인 동시에, 흔히 말하는 '486' 민주화 세대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세대다. 작가 성석제는 베이비부머 중 한가운데인 1960년생이고, 그의 신작 소설 <투명인간(2014)>의 주인공 '김만수' 역시 1960년생이다.

 

2014년인 지금, 베이비붐 세대는 말 그대로 50대 그 자체다. 보통 196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들(50대 후반)은 개발독재 · 압축성장 · 군사문화에 상대적으로 순응적인 편이고, 1960년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들(50대 전반)은 486 민주화 세대에 가까운 정서를 보인다. 쉽게 말해 베이비붐 세대 중 막내들이 486 세대의 맏형인데(1961년생이 1980년도에 대학 입학), 현재 50대가 전체적으로는 여당 지지율이 높은 반면 이들은 야당에 좀 더 호의적이다.

 

결국 성석제와 동갑인 <투명인간> 속 주인공 김만수는, 베이비붐 세대의 중심이면서 민주화 이전 세대의 마지막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50대 남성들은 어떠한가? 요즘 50대 남성의 자살자 비율은 전 연령을 통틀어 가장 높고, 비슷한 또래의 여성에 비해서도 무려 세 배나 더 많다. 도대체 왜, 한국의 50대 남성 자살률은 유독 이렇게 높을까? 과연, 무엇이 베이비부머를 '위기의 세대'로 만들었을까?

 

투명인간
성석제 (지은이) | 창비 | 2014-06-30 | 372쪽

 

[사진 출처: 경향신문] 

 

이 작품은 베이비붐 세대에게 바치는 성석제의 '엘레지(elegy, 슬픔의 노래)'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50대 친구들을 위한 역사 탐구의 결과물이다. 작가는 김만수라는 인물 또 그의 부모와 자식·주변인들의 삶을 통해 지난 100년 동안 한반도의 민중들이 겪어온 격동의 세월을 집약하고,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어떻게 '연속성'을 지니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연속성은 이 소설이 20대든 80대든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상처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바로 이런 부분들이 개인적으로도 참 아프게 다가왔다.

 

익숙하지만 슬픈 '내용'을 실험적이지만 담대한 '형식'으로

 

사실 <투명인간>의 주요 내용들은 다 어디서 한 번쯤은 봤던 얘기들이다. 일제시대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작가들이 계속 다뤘던 것들이고, 부분적으로는 거의 똑같은 줄거리로 요약될 수 있는 내용이다. 덕망 있고 존경 받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엘리트 젊은이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가혹한 고문과 감옥생활을 겪으며 좌절하고 집안도 풍비박산 나는 이야기(만수 할아버지)라든가, 명석하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자기 공부는 포기하고 남자 형제들 뒷바라지를 한다고 개발독재 시절에 공장에서 일하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심신이 파괴된 비극적 여인의 이야기(만수 누나) 등을 우리는 이제까지 익숙하게 봐왔다.

 

만약 성석제가 이런 오래된 슬픔에만 주목해서 그대로 갖다 썼다면, 이 소설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고리타분한 작품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상당히 새로운 형식에 버무려 넣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십 개의 이야기들을 각 내용의 주요인물이 직접 화자가 되어서 서술하며(<투명인간>에 등장하는 화자는 자그마치 서른 명이 넘는다), 거의 시간순으로 각 챕터마다 다른 화자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월남 파병을 가는 만수의 형 이야기는 그 형이 직접 편지글 형식으로 서술하고, 바로 뒤이어서 이 무렵 국민학교를 마치는 만수의 졸업식은 만수의 누나가 목격담 형식으로 전한 다음, 고엽제로 인해 만수 형이 죽는 내용은 만수 할아버지의 입으로 원통함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우리 역사 속 수많은 비극을 적재적소에 다 보여주면서도 과도하게 어느 한 부분의 슬픔에 독자들이 빠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연속된 상처들과 일정한 거리감을 획득하고, 최대한 담대하게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런 형식은 각 챕터마다 화자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좀 혼란스럽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실험적인 서술 방식은 너무 익숙해서 자칫 식상할 수 있는 내용에 입체적인 생동감을 부여한다. <투명인간>의 줄거리 자체가 그렇게 편히 읽을 수 있는 편도 아니고, 아마도 나이가 적을수록 점점 더 공감하기 힘든 내용일 수도 있는데, 이런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와 같은 불편함을 상당 부분 희석시키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풀어낼 수 있는 열쇠, 역사적 맥락

 

서른 명이 넘는 화자가 각 챕터별로 1인칭 서술을 하기 때문에, 성석제의 이 신작 장편소설은 우리의 역사를 잘 모르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약간 애를 먹을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를 테면, 3남 3녀 6남매 중 넷째인 만수가 60년생이고 첫째인 백수는 51년생 · 둘째 금희는 54년생 · 셋째 명희는 57년생 · 다섯째 석수는 62년생 · 여섯째 옥희가 66년생인데(작가가 이걸 직접적으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10월 유신'이 1972년이고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1983년이며 문민정부가 93년부터 97년까지 집권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주요 인물들의 나이와 이야기의 흐름을 그때 그때 제대로 연결해서 내용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순수한 하나의 스토리로서만 이 작품을 본다면 크게 상관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마치 외국사람이 읽은 <투명인간>의 이해 수준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한국사람이라면 자매가 남자형제를 위해 자신의 공부를 중단해야만 하는 상황에 가슴이 아릴 테고, 연탄가스 중독인데 치료를 둘 중에 한 사람만 받을 수 있어서 나머지 한 명이 바보가 되는 상황을 보며 그저 화를 내기보다는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을 느낄 것이다. 왜냐 하면,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게 주변사람 한 둘을 탓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아니까..

 

그래서 이 소설은 더욱더 편하게 읽을 수만은 없고, 단순한 재미가 아닌 일종의 '한(恨)'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기품 있고 학식 높은 만수의 할아버지가 왜 조국이 해방되고 나서도 고향 읍내로 돌아올 수 없었는지, 대한민국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도 있었을 수재 백수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월남에 갔다가 객사하게 됐는지, 또 민주화 운동의 어두운 면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등이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앞서 말한 실험적 형식의 '거리감' 덕분에, 비교적 담담하게 전체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 공간을 확보한다. 비록 각 독자의 경험과 역사 인식에 따른 '상처들'이 작품을 읽는 동안 적잖이 쓰라리겠지만..

 

[<투명인간> 가제본]

 

단 한 차례도 화자로 직접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

 

위에서 말했듯이, 작가와 같은 해에 태어난 김만수가 <투명인간>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만수는 서른 명이 넘는 화자가 등장할 동안, 단 한 번도 직접 화자가 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김만수만 빼고 주변 인물들이 전부 다 화자로 등장한다(일종의 1인칭 관찰자 시점). 이들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만수 얘기를 하기도 하는데, 넓게 보면 이 모든 건 김만수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수의 움직임이 일단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어느새 독자는 전체적으로는 만수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부분적으로는 각 챕터의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다중적 감정이입의 단계에 들어선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각자 입장이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다층적으로 감정적 동조를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만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체로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는데, 둘 중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그냥 양쪽을 일정 부분씩 이해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소개하자면, 만수 할아버지의 장점과 만수 아버지의 장점이 만수에게서 둘 다 발현되는 부분이다.

 

 

"남편(만수 할아버지)은 서울서 학교에 다닐 때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사람이 모여 앉아 토의를 하고 토의 결과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생활해왔다고 했다."

 

"김만수는 사장이 한 말을 전하고 나서 모든 것을 회의를 통해 정하자고 했다. 자신이 회의의 진행을 맡고 기록을 했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을 모아서 모든 일을 처리하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결정이 내려진다 해도 불만이 없었다. 충분히 토론을 했기 때문이다."

 

 

 

"만수는 몸은 제 할아버지를 닮아 빌빌거리는데 내가 닦달해서 어디 데려다놔도 굶어 죽지 않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일찍부터 일은 많이 배웠다."

 

"만수 오빠는 어릴 때부터 먹을 것을 찾아서 산과 들을 종일 쏘다니다 밤이 이슥해 집으로 돌아왔다. 한번도 빈손으로 온 적이 없었다."

 

 

타고난 학자 타입인 할아버지와 상농사꾼 아버지로부터 좋은 것 한 가지씩을 제대로 물려받은 만수. 바로 이 김만수 같은 사람들이 고도 성장시대의 산업 역군이었고, 이들의 노력이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기. 이러다 보면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시대와 사회의 왜곡에 관하여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특히 50대 베이비붐 세대의 아픔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보수적인 50대 남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참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60년생 성석제의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그저 답답해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그래도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이들을 담담하게 바라볼 용기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한편 만수의 목소리가 아닌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만수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셈이니까, 이런 이야기 구조 자체는 만수를 마치 각 부분의 작은 조각들을 이어붙여서 전체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종이인형'처럼 보이게 한다. 한 조각은 어떤 화자가 바라보는 만수의 일면이고, 이것들이 덕지덕지 모이고 덧붙여져서 하나의 인물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진정한 생명력은 어차피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므로, 만수의 목소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타자의 시선으로 간접적으로 서술한 건,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비현실적인 '투명인간' 이야기를 할 때 독자들이 느낄 수 있는 위화감을 상쇄시켜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가장 업신여김당한 김만수에게서 정의와 책임을 발견하는 아이러니

 

만수는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만 크고 손발이 시원찮았으며, 자라면서도 늦되고 어리숙했다. 비실비실 허약하고 주눅이 들어 매사에 자신이 없었고, 다른 다섯 형제자매와는 달리 머리도 별로 명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 세대의 애정어린 보살핌, 자신의 순박함과 끈기·긍정적 사고, 이후 세대에 대한 책임감과 남다른 노력 덕분에 모두 다 힘든 시절 주변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김만수의 희생과 도움을 쉽게 잊었고,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지만 항상 힘들게 살았다.

 

격동의 세월, 잘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끝까지 한결같은 모습을 보인 유일한 사람은 만수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절한 다음에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우리 일곱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정의가 뭔지도 모르고 책임 지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 시대, 김만수는 마지막 선비였던 할아버지의 당부대로 진정 '염치'를 아는 인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기차가 전복되고 비행기 떨어지고 서해상에서 페리 가라앉고 한강다리 무너지고 도시가스 폭발해서 애먼 사람들"이 죽고 나서도 또 한참 뒤에 여전히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듯이 만수에게는 또다시 시련이 닥치고, 결국 그는 '투명인간'으로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고 만다. 책임과 정의가 투명인간처럼 사라져버린 지금 이 순간의 대한민국, 역사적으로 피하기 힘든 연속성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상처들은 끝내 치유되지 못한 것이다.

 

투명인간 - 8점
성석제 지음/창비

 

베이비부머를 향한 엘레지인 동시에 배턴터치 선언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기껏해야 죽기 직전 만수의 입을 빌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투명인간>의 마지막 문장은 "형. 만수 형."인데, 마치 작가가 모든 베이비붐 세대를 부르는 소리 같다. 어쩌면 50대 중반의 성석제가 자기 위에 '어른'이라고 할 만한 존재를 끝내 찾지 못하고 한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대한민국에 진정한 어른이 있는가? 베이비부머 이전에도 없고, 지금 50대는 스스로 어른이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왠지 이 작품에는 그런 '회한'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작가는 < 투명인간 > 속 세상은 실제보다 완화된 이야기라고 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참 어떻게 살지, 그런 생각이 드는데도 다 살고 있거든요. 세상에서 < 투명인간 > 같은 상황이 아닌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요. 물론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작가가 작품 후반부를 쓰던 중 세월호가 침몰했고 소설도 달라졌다. 그는 "순간적으로 이 소설은 어쩌면 영원히 완성을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이 들었다"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많아서 새로 집어넣기보다는 뺀 게 많다"고 말했다. 

- 경향신문(2014/06/29) 기사 <2년 만에 신작 '투명인간' 낸 성석제 "작품 후반부 쓰던 중 세월호 침몰, 영원히 완성 못할 것 같은 절망감"> 발췌

 

그래서 그런지, 베이비붐 이전 세대에 대한 내용은 비교적 충실한데 비해 50대 이후 젊은 세대에 대한 부분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어린 학생들이 거의 '학살' 당한 세월호 참사가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작가는 세월호 참사를 보며 50대 이상 세대들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린 듯하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투명인간>의 후반부와 결말이 좀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1960년생 성석제는 이 작품을 통해 베이비부머 친구들과 그 이전 세대에 대하여 담담한 평가를 내렸고, 그 이후 세대가 50대 이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마지막에 "나는 포기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만수는 투명인간으로서 끝내 생을 마감했고, 이 소설은 출간되긴 했지만 아쉽게도 완결되진 못했다. 작가는 자신있게 스스로 어른이라고 말하지 못한 것처럼, 이후 세대에 대한 서술 역시 자신있게 마무리짓지 못했다(실질적인 이야기는 아들처럼 키우던 조카가 자살하고 아내가 신장을 이식 받은 2000년대 초반에 멈춰서고 만다). 김만수가 최초로 분노하는 모습이 그려진 다음에 뭔가 더 스토리가 진행될 법한데, 그대로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더 앞으로 나가지 않고, 성석제의 '지친 베이비붐 세대에게 바치는' 엘레지로 남았다.

 

신문 기사 속 작가의 말대로 세월호 참사를 보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많아서'였는지, 이후 10여 년은 그냥 공백으로 처리된 것이다(2000년대 초반~현재). <투명인간> 속의 바로 이 빈 공간, 50대의 자식 세대들 이야기는 앞으로 젊은이들이 채워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 베이비부머는 이제 투명인간과 같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고, 60년생 성석제도 완결보다는 불완전한 엘레지를 선택했다(이후 세대에 대한 '참견'보다는, 차라리 '단절'을 통한 변화를 기약했다). 이제 우리는 담담하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역사적 상처들을 끌어안고 새로운 연속성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투명인간'이라는 제목 자체가 회한 많은 베이비붐 세대의 바로 이 '배턴터치 선언'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창비 '책읽는당'을 통해 <투명인간> 가제본을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