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의 중심지였던 1887년 파리, 툴루즈 로트레크와 빈센트 반 고흐의 만남.
예술사에 관심을 좀 가지다 보면, 예술가들의 각 작품만큼이나 무척 흥미로운 순간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예를 들어, 1504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가 시의회의 대회의실 벽면에 피렌체 시의 역사와 관련된 그림을 동시에 의뢰 받고 모든 시민들 앞에서 경쟁했다고 한다. 서양미술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거장이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한 순간 만난 것인데, 바로 이 16세기 초반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고, 이때의 피렌체는 미술사적으로도 가장 큰 중심지였다.
또 다른 예로는 18세기 후반의 비엔나를 들 수 있겠는데, 1780년대 오스트리아 빈은 우리가 아는 서양음악사 최고의 작곡가들이 한 데 모여 있었으며 역시 음악사적으로도 아주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 곳에는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1809)이 한꺼번에 존재했으며, 1787년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드디어 직접 만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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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하게, 19세기 후반인 1880년대의 프랑스 파리는 서양미술의 중심지였다. 1870년 나폴레옹 3세(Louis-Napoléon Bonaparte, Napoleon III)의 제2제정이 끝나고 수립된 제3공화국, 이때의 파리는 무척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온갖 새로운 미술이 등장했으며 모든 서양미술가들의 꿈의 도시였다. 그 자체가 명실상부한 서양미술의 역사였던 1887년의 파리,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만났던 바로 그 역사적인 순간으로부터 딱 100년 후,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초상화를 그린다.
파리의 물랑루즈 화가 Toulouse-Lautrec과 스스로 농민화가라고 생각했던 van Gogh.. 언뜻 보기에 두 사람은 무척 다른 것 같지만, 서양미술사의 두 위대한 천재를 진지하게 살펴보면 공통점도 상당히 많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인간 툴루즈 로트레크와 인간 반 고흐에 대해서, 로트렉이 그린 고흐의 초상화를 통해 알아보려고 한다. 미사여구조차 굳이 필요 없는 두 화가가 과연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지, 지금부터 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도록 하자.
[툴루즈 로트레크(좌)와 빈센트 반 고흐(The only authenticated photo of Vincent van Gogh is now this portrait taken when he was 19. Credit: Vincent van Gogh Foundation)]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는 1864년 남프랑스의 오래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로트렉은 하반신이 과도하게 짧은 난쟁이의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어렸을 때 겪은 두 번의 낙마사고로 인해 뼈가 부러져서 다리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귀족 가문에서 빈번했던 근친혼이 원인이었는지,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원래 성장이 더뎠으며 유전적으로도 굉장히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툴루즈 로트레크는 귀족들의 스포츠와 레저 활동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고, 사진에서 보듯 지팡이에 의지해 뒤뚱거려야 했으며, 말을 할 때 발음까지 정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들을 바탕으로, 로트렉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 소외된 기피의 대상이었을 거라는 짐작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쩌면 이것이 그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인지, 툴루즈 로트레크는 화가로서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고 비평가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은 편이다.
한편,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옛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농촌이었는데, 개신교 목사 집안인 고흐와는 달리 가톨릭 일색이었다고 한다. 가문 자체만 보면 툴루즈 로트레크의 집안에 비해 빈센트의 집안은 사회적으로 확실히 비주류에 속했으며, 고흐 가문은 상당히 가난했던 걸로 보인다. 반 고흐는 10대 초반에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영어와 불어 그리고 네덜란드어를 완벽하게 익혔고 독어에도 상당히 숙달되었다고 한다.
고흐의 아버지 쪽 4명의 형제 중 3명이 화상(畵商)이었고, 그와 대부분의 편지를 교환하며 경제적인 지원을 해줬던 동생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 1857~1891)도 화상이 되었다. 그래서 반 고흐 역시 젊었을 때 화상 일을 했으며, 그의 연보를 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화상 생활을 하게 된다. 바로 이때 고흐의 능숙한 외국어 실력이 큰 도움이 되었고, 화가로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들 알다시피, 고흐는 정신적으로 좀 유별난 데가 있었고, 언제나 소위 말하는 '왕따'에 가까웠다.
익히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긴 방황을 거쳐, 1886년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로 와서 2년간 동생 테오와 같이 살았다고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때의 파리는 모든 서양미술가들이 꿈꾸는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제3공화국 하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온갖 새로운 예술이 등장했다. 특히 인상주의는 불과 20여 년 전 '인상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보수적인 미술가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 새로운 예술들의 명실상부한 선두주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모든 미술사조와 마찬가지로 호평을 받게 된 인상주의도 점점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빈센트가 만난 인상주의 화가들 역시 서로 비난하기에 바빴다고 한다.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파리에 새로운 두 천재이자 공히 왕따였던 Toulouse-Lautrec과 Vincent van Gogh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 둘은 1986년 4월에 처음 만났고, 이듬해에는 툴루즈 로트레크가 반 고흐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한다.
로트렉이 그린 고흐의 초상화, 1887년. 54 × 45 cm,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툴루즈 로트레크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두 예술가에게서 흥미로운 공통점들을 꽤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다른 것보다 우선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참 친했다고 하는데, 상대적으로 부유했지만 선천적인 핸디캡(난쟁이, 유전 문제)을 갖고 있던 로트렉과 극심하게 가난했고 후천적으로 핸디캡(자괴감, 정신 질환)을 가진 고흐는 둘 다 다른 이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었기에, 서로 통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 않았나 싶다. 다시 말해, 툴루즈 로트레크와 반 고흐는 상대방이 자신과 비슷하게 어두운 면이 있다는 걸 함께 알아차린 듯하고, 그것은 다른 정상적인 화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가 되어 둘 사이에 일종의 동질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위의 로트렉이 그린 고흐의 초상화만 봐도 그렇다. 왠지 일반적인 초상화나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좀 다른 것 같지 않은가? 툴루즈 로트레크는 이 그림에서 고흐라는 화가의 모습을 그저 사진처럼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라, (마치 대상의 마음을 꿰뚤어 보듯이) 인간 고흐의 분위기와 내면세계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고흐라는 사람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 중에 대표적인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고흐의 자화상보다 더..
또한, 고흐와 로트렉은 살아 생전에 쉽게 어느 유파의 일원이었다고 말하기가 힘들 정도로 자기만의 양식을 발전시켰다는 점이 비슷한 듯하다. 먼저 고흐의 얘기를 하자면, 그는 보통 '후기 인상주의'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때가 많다. 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후기 인상주의라는 게 도대체 뭔가? 그것에 어떤 특징적인 양식이 분명하게 있는가? 이건 사실상 '근대 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과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의 조합일 따름 아닌가? 곰브리치(E. H. Gombrich, 1909~2001)가 그의 저서 서양미술사에서 정리했던 것처럼, 세잔은 입체주의(Cubism)를, 고갱은 원시주의(Primitivism)를, 고흐는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일으키면서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는 것 외에, 후기 인상주의라고들 부르는 사조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양식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쉽게 말해서, 빈센트 반 고흐는 그냥 고흐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툴루즈 로트레크도 마찬가지다. 동시대 인상파(Impressionism)나 자포니즘(Japonism)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로트렉 역시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일상 생활에서도 외톨이에 가까웠던 두 사람은 예술적으로도 혼자였고, 이것은 바로 다음의 공통점으로도 그대로 연결되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Vincent van Gogh와 Toulouse-Lautrec은 둘 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고흐가 자살했을 때 나이(1890 - 1853)는 37세였고, 로트렉이 생을 마감한 나이(1901 - 1864) 역시 비슷하다. 요절한 두 천재화가는 항상 고독했고, 죽기 전까지 알코올 중독과 심각한 정신 착란에 시달렸다. 반 고흐는 몇 번이나 정신병원을 들락거렸으며, 결국 들판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았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원래 약했던 몸에 불규칙한 생활과 수면 부족이 겹치며 몸에 마비 증상이 왔고, 별장에서 요양을 하던 중 끝내 목숨이 다하고 말았다.
고흐와 로트렉 두 사람은 짧은 생애 동안 엄청난 수의 작품을 남긴 것도 똑같은데, van Gogh는 1881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1890년에 자살할 때까지 약 십여 년 동안 800여 점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스케치를 남겼고, Toulouse-Lautrec도 700점 이상의 캔버스화, 300여 점에 가까운 수채화, 350여 점에 이르는 판화와 포스터, 무려 4500여 점이 훨씬 넘는 드로잉을 남겼다. 반 고흐와 툴루즈 로트레크는 자기들이 그렇게 빨리 죽을 줄 알고 있었을까? 겨우 37년 동안 이들은 시간에 비해 정말 많은 그림을 그렸고, 자신들의 외로움과 고통만큼이나 뜨거운 예술혼을 불태우는 데에 전혀 쉼이 없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18세기 후반에 비엔나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만났듯이, 19세기 후반에 파리에서 만난 툴루즈 로트레크와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한 사람은 귀족 출신이었고 화려한 물랑루즈를 화폭에 담았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평민 출신에다가 보통 사람들의 삶을 주로 화폭에 담았다. 두 화가는 상당히 달랐지만, 비슷한 점도 꽤 많았다. 로트렉과 고흐는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며,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고, 젊은 나이에 명을 달리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귀족이었던 Toulouse-Lautrec은 그들에게 소외 당하면서도 새로운 기법으로 물랑루즈를 그렸고, 가난했던 Vincent van Gogh는 진정한 농민화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아마 두 천재화가는 서로를 알아봤을 테고, 그것이 바로 앞에서 본 로트렉이 그린 고흐의 초상화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툴루즈 로트레크와 빈센트 반 고흐는 진심으로 교감했고, (자신과 유사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상대방을 완전히 끌어안지 못하는) 각자의 트라우마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오랫동안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인간적으로 친한 친구였다고 믿는다. 요즘 한국에서도 왕따가 사회적으로 굉장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데, 만약 로트렉과 고흐처럼 서로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다면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 주위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바로 툴루즈 로트레크와 빈센트 반 고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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