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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 α

고흐의 편지를 통해서 본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낭만주의 거장 들라크루아와 사실주의 거장 쿠르베, 같은 해에 그린 같은 사람의 초상화.

 

아래 글은 1888년 12월 18일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고흐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함께 몽펠리에 미술관을 방문한 날이 12월 17일이었다]

 

"사랑하는 테오, 어제 고갱과 나는 몽펠리에 미술관, 특히 브뤼야스의 방을 보러 갔어. 거기에는 들라크루아, 리카르, 쿠르베, 카바넬, 쿠튀르, 베르디에, 타세르트 등이 그린 브뤼야스의 초상화들이 있었어... 브뤼야스는 화가들의 후원자였어. 더이상 말할 건 없어. 들라크루아가 그린 초상화 속의 그는 붉은 머리칼과 수염이 있는 신사인데, 그 점에서 나나 너와 닮아서 뮈세의 시를 생각나게 해.

 

내가 가는 곳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와서 곁에 앉아
형제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검은 옷의 불행한 사람

 

너도 그 그림을 보면 같은 느낌을 받을 거야...  거기에는 쿠르베 작품으로 1. [시골 소녀들], 풍경 속에서 한 사람은 등을 돌린 나부이고, 또 한 사람은 지면에 있는 훌륭한 작품 2. [실을 잦는 여인](걸작이야), 그 밖에도 많아. 여하튼 너는 이 컬렉션을 알아야 하고, 아니면 최소한 그것을 보고 말하는 사람들과 알고 지내야 해... 너에게 반드시 몽펠리에 미술관을 보여주고 싶어. 정말 좋은 작품이 많아! 고갱과 내가 몽펠리에에 가서 들라크루아가 그린 브뤼야스의 초상을 보았다고 드가에게 전해주렴. 왜냐하면 들라크루아가 그린 브뤼야스의 초상이 다른 형제처럼 우리와 닮았음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야" 

 

이 편지에서 고흐는 '알프레드 브뤼야스(Alfred Bruyas, 1821~1876)'라는 인물을 언급하며 들라크루아가 그린 초상화 속의 인물이 자신이나 테오와 닮았다는 걸 동생에게 말하고 있다. 편지 속 몽펠리에 미술관은 프랑스 몽펠리에에 위치한 파브르 미술관을 지칭하는데, 고흐가 본 것은 아래의 그림일 것이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브뤼야스의 초상화, 1853년. 116 x 89 cm, 몽펠리에 파브르미술관
(브뤼야스, 빈센트, 테오 반 고흐)


세 사람이 좀 닮은 것 같은가?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고흐가 적은 뮈세의 시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형제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검은 옷의 불행한 사람"이라.. '화가'인 빈센트와 '화상(畵商)'인 테오, 이 형제를 닮은 검은 옷의 '컬렉터' 브뤼야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화상은 그림을 팔고, 컬렉터는 그림을 산다. 마치 [화가, 화상, 컬렉터] 그리고 [닮았다, 지켜준다, 알아야 한다]가 묘하게 서로 공명을 일으키는 듯하다.

 

고흐는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와 함께 들라크루아를 아주 높이 평가했던 걸로 보이는데, 그의 편지들에도 들라크루아에 관해 참 많은 얘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과 그것을 모사한 고흐의 [착한 사마리아인]

 

고흐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낭만주의 거장인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1798~1863)' 외에도 여러 화가들이 저명한 미술 컬렉터인 브뤼야스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중에는 대표적인 사실주의 거장인 '귀스타브 쿠르베(Jean-Désiré Gustave Courbet, 1819~1877)'도 있었다. 쿠르베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후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게 되는 그림에도 자신의 후원자인 브뤼야스를 등장시키고 있다.

 

 

아래에서 왼쪽의 초상화와 오른쪽의 작품을 같이 보면, 누가봐도 세 사람 중에 가운데 있는 사람은 브뤼야스라는 걸 알 수 있다. 브뤼야스의 양쪽에 있는 사람과 개는 그의 일행인 것 같고, 맞은편에 있는 사람은 그림의 제목인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로 쿠르베 자신이다.

 

등산복 같은 걸 입고 화구통을 짊어진 채 자기 그림을 사주는 컬렉터와 만난 쿠르베. 양복을 입은 브뤼야스는 하인과 개까지 데리고 길 위에 섰고, 쿠르베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그를 쳐다본다. 이 장면을 상상해보니, 왠지 고흐가 적은 위의 시가 다시 떠오른다. 검은 옷의 불행한 사람.

 

쿠르베가 그린 브뤼야스의 초상화, 1853년. 91 x 72 cm, 몽펠리에 파브르미술관
귀스타브 쿠르베,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 1854년. 129 x 149 cm, 몽펠리에 파브르미술관

이러한 느낌은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J. Gombrich, 1909~2001)'의 저서 [서양미술사(1950)]를 보면 좀 더 선명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당시의 널리 인정된 인습에 대한 항의가 되길 원했고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이 자만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랐으며, 상투적이고 능란한 조작에 대해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했다... 그는 1854년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으로 먹고 살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원칙을 벗어나거나 양심에 어긋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네. 또 누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아니면 쉽게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네.' 평범한 효과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세계를 본 그대로 표현하려는 쿠르베의 노력은..."

 

그리고 쿠르베는 이 작품에 '천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부(富)'라는 부제까지 붙였다고 하니, 이런 혐의는 더 짙어진다.

아무튼, 고흐는 쿠르베의 작품을 훌륭한, 심지어는 걸작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고흐가 편지에서 말한 쿠르베의 첫 번째 작품은 아마도 [목욕하는 여인들]인 듯하고, 두 번째는 [실 잣다 잠든 여인]으로 알려진 그림을 뜻하는 것 같다. 둘 다 쿠르베의 1853년도 작품이고, 역시 파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쿠르베, [목욕하는 여인들], 1853년. 227 x 193 cm, 몽펠리에 파브르미술관
쿠르베, [실 잣다 잠든 여인], 1853년. 115 x 91 cm, 몽펠리에 파브르미술관

 

고흐가 극찬했다고 하니, 두 그림이 뭔가 다르게 다가오지 않는가? 왼쪽 작품은 그해 살롱에 출품했다가 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악평을 받았던 그림인데, 그래도 브뤼야스는 기꺼이 사줬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이 그림을 본 나폴레옹 3세도 분노를 표했고 심지어는 들라크루아까지 쿠르베의 영감에 감탄하면서도 얼굴을 찡그렸단다. 오른쪽 작품은 아를에서 서민적인 이웃들을 즐겨 그렸던 고흐를 떠올려보면, 그가 참 좋아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림이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브뤼야스, 쿠르베가 그린 브뤼야스

 

이렇게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한 통을 가지고, 거기 언급된 알프레드 브뤼야스를 통해 외젠 들라크루아와 귀스타브 쿠르베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서양미술사에서 정말 빼놓을 수 없는 '낭만주의' 거장 들라크루아와 '사실주의' 거장 쿠르베. 이 두 위대한 화가가 같은 해(1853년)에, 같은 사람을 그린 초상화를 다시 한 번 더 보면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