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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α

영화 '판도라' 엔딩의 진정한 의미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의 진실.


일반적으로 '재난영화'는 대부분 제작비가 많이 들고, 흔히 말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일종의 장르물로서 재난영화는 클리셰도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특히 한국의 재난영화들은 주로 관객의 감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희생적인 주인공이나 신파적 상황 설정 등의 상투적 장치를 자주 사용한다. 원전사고를 다룬 재난영화인 [판도라] 역시 이런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일반적인 재난영화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하나 갖고 있다. 영화의 전체 흐름상 표면적으로는 해피엔딩에 가깝긴 한데,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은 전혀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가 없다. 판도라를 보며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에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면 해피엔딩은 아니고 또 이 영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판도라(Pandora, 2016)
드라마/스릴러, 재난 | 한국 | 136분 | 2016-12-07 개봉 | 감독: 박정우
출연: 김남길(강재혁 役), 김영애(어머니 석여사 役), 문정희(형수 정혜 役), 정진영(발전소 박소장 役), 이경영(총리 役), 김명민(대통령 役)


재난영화에서는 보통 극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이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 과거에 이미 발생했던 재난을 본뜨거나 실재하는 장소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판도라의 주된 내용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본떴고, 영화의 배경인 월촌리는 바로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고리'다.



실제로, 부산과 울산에 걸쳐 있는 '고리 원전단지'는 지구촌에서 현재 가동되고 있는 원전단지 중에 세계 최대 규모다. 고리에만 무려 7기의 원전(고리 1~4호기, 신고리 1~3호기)이 있으며, 영화 속에서 폭발이 일어난 한별 1호기는 '국내 최고령 노후 원전' 고리 1호기를 모델로 하고 있다. 원래의 설계수명 30년에서 장장 9년을 초과하여 아직도 가동 중인 고리 1호기는 또다시 10년을 더 연장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현재까지는 내년 6월에 폐쇄될 예정에 있다.


[출처: 그린피스]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원전 밀집도가 가장 높은 나라다(미국의 20배, 러시아의 100배). 전체 25기의 원전은 총 4개의 단지에 집중되어 있는데, 전 세계의 밀집 원전단지 상위 10개 중에 4개가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원전을 보유한 동시에 원전 밀집도 1위인 국가. 한국은 규모면에서나 밀집도 측면에서 제일 심각한 나라이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표현된 원전사고 장면은 어쩌면 실제로 벌어질 비극보다 오히려 더 절제된 모습일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고리(부산/울산)에 3개 · 한울(울진)에 4개의 원전을 더 추가할 예정이고(신고리 4호기는 2017년 상반기 시운전 실시), 삼척과 영덕에 새로운 원전 부지를 만들어 4개를 더 추가할 계획이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적으로 태양광과 풍력 등 안전하고 깨끗한 재생가능에너지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는데도, 한국은 이미 '사양산업'이 된 원자력발전에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행보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후쿠시마의 지진 역시 영화 내에서 똑같이 발생하는데, 한반도가 더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은 다수의 징후와 수많은 전문가의 지적을 보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다. 다들 알다시피 지난 9월에 경주에서 5.8 규모의 강진이 발생했고, 이후 발생한 여진만 해도 벌써 500회가 넘는다. 그리고 요즘 뉴스를 조금만 더 세심하게 살펴보면, 매주 한반도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는 걸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출처: 기상청 지진정보서비스 트위터(@KMA_earthquake) 지진통보 갈무리]


지난 10월 말 한국을 방문한 일본 반핵평화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히로세 다카시'는 27년 전에 쓴 자신의 저서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예측했던 인물이다. 그는 "지진이 잦은 곳에서는 언젠가 큰 지진이 나는 게 자연의 이치다. 한국 원전의 내진설계 기준은 너무 낮게 설정돼 있다"며 "경주 지진은 하늘이 주는 경고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진이 더욱 두려운 건 원전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히로세 다카시는 "아무리 경고해도 일본 사람들이 듣지를 않았다. 이대로 가면 한국도 늦어버릴 것이다"라고 했는데, 최근 한 달 사이에 기상청이 공식트위터로 통보한 한반도 내 지진만 해도 거의 20회에 육박한다. 그의 말대로 미래의 지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단언할 수 없겠지만, 지금 당장 한국의 4개 원전단지 중 한 곳에 영화 속에서처럼 강진이 발생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건 없는 셈이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고리 원전단지 30km 반경 내에 무려 380만 명(부산 250만, 울산 100만, 양산 30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전사고가 발생하면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들은 반경 30km 내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고,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둘 다 피난구역으로 30km가 설정됐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당시에 30km 반경 내 인구는 17만 명이었다는데, 우리는 그보다 22배나 많은 사람들이 고리 원전단지 주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대형 원전단지 반경 30km 내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처: 그린피스]


만약 '판도라'의 지진과 원전 폭발이 이곳에서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380만 명이 대피한다는 것 자체가 아마 불가능할 테고, 대한민국 전역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래도 영화에서는 맨 마지막에 언뜻 보면 해피엔딩인 것처럼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참혹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어 폐쇄되고, 후쿠시마와 같이 어쨌든 제염작업을 실시해야만 할 것이다.


"(제염작업은) 땅 위의 몇 cm 정도의 흙을 긁어내는 거예요. 그걸 1m x 1m x 1m 되는 검은색 포댓자루에 담아요. 후쿠시마에 올해 10월 기준으로 1,000개 넘게 쌓여있는 방사성 폐기물이 노지에 쌓여있는 곳들이 145,000군데예요. 버릴 데가 없어요."

- 그린피스 원전 전문가, 장다울 캠페이너


한때 대한민국 제2의 도시였던 부산 일대에 1세제곱미터짜리 포댓자루 1,000개가 쌓아올려진 거대한 검은색 방사능 덩어리가 수십만 군데 흩어져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380만 명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이런 처절한 제염작업을 도대체 누가 얼마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농도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으로 들어가 작업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그 비용은? 한마디로, 세계 최대 규모인 고리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우리나라는 끝장이다.



아마도, 한국이 망한다면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전쟁 아니면 원전사고. 판도라가 해피엔딩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지 않을 경우 보여줄 수 있는 게 '멸망'뿐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은 원전사고의 치명적 위험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의 측면에서는 황당무계하지 않은 결말과 재난영화의 클리셰 사이에서 타협한 셈이다. 이런 마무리는 신파적 감동 코드와 함께 판도라의 흥행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 속에서 원전의 실체적 위협 앞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다가 그저 마지막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데에만 그친다면 '판도라'의 진실을 제대로 알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지금 이 순간 본인이 380만 명 중에 한 사람이라면, 전쟁에 관한 우려의 반의반만이라도 원전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우리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원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행동한다면,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재 신고리 5, 6호기 건설허가 취소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고리 원전단지의 9번째·10번째 원전인 신고리 5, 6호기는 지난 6월에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건설허가가 승인됐고, 국내 최초의 원전허가 취소소송이 9월에 제기됐다. 전국 각지의 시민 559명이 국민소송단으로 참여했고(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곧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답변서가 나오면 2017년 1월 중에 서울행정법원에서 재판이 열릴 걸로 보인다. 소송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건설허가 취소를 요구하는 서명은 누구나 금방 할 수 있다. 영화 판도라에 공감한 수백 만 명의 시민과 함께, 우리의 탈핵행동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