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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α

매즈 미켈슨의 '더 헌트', 한국에선 영화가 아닌 일상

불완전한 인간이 '선량한 시민'의 집단 판타지를 유지하는 방법.


얼마 전 발표된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조작된 기억도 진짜 기억으로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범죄 현장을 목격한 이의 진술을 누군가 몰래 수정하거나 다시 써도, 목격자 본인조차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사람들은 자신의 첫 진술이 변경되었을 때 이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같은 실험에서 무려 과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처음 범인으로 지목했던 인물과 (실험적 조작을 거친 후) 나중에 다시 고른 인물이 달랐다. 하지만, 이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 자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기억이라는 건 무척 불완전하고, 마음만 먹으면 웬만큼 다 조작이 가능한 셈이다. 자기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어떤 사회에 살든, 그 사회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문제들과 관련된 각양각색의 '두려움'을 구성원들은 갖기 마련이다. 소위 말하는 사회화를 통해 사람들은 그런 두려움(어떤 현상이나 경험을 예상했을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불안한 감정)을 습득하고, 이것은 사회에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이를 테면 그런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도 하지만, 또 반대로 이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 해야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라고 루즈벨트가 말했듯, 두려움이 이성적 사고를 방해하는 경우도 많다. 그 사회에서 터부시하는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침묵하거나 은폐하고, 심지어는 조작을 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왜곡을 막기 위해 각종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그저 한두 사람의 임의적인 결정이 아닌 사전에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우리는 행동하도록 강제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기에, 이런 존재들이 모인 사회에서 완벽함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또 흔히 말하는 사회적 관계의 압력도 일종의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혼자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집단'에 속해 있으니, 바로 그 집단의 논리까지 가세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지게 된다. 역사적으로 집단의 광기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결국, 분명하고 냉정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 어떤 두려움이나 집단의 논리도 이보다 더 우선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 헌트(Jagten, The Hunt, 2012)

드라마 | 덴마크 | 115 분 | 제25회 유럽영화상 각본상, 제65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 국내개봉 2013-01-24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Thomas Vinterberg) | 출연: 매즈 미켈슨(Mads Mikkelsen, 루카스 役), 라세 포겔스트룀(아들 마르쿠스 ), 토마스 보 라센(친구 테오 役), 안네 루이즈 하싱(아그네스 役), 아니카 베데르코프(클라라 役), 수세 볼드(유치원 원장 그레테 役)


이 영화의 주인공 루카스(매즈 미켈슨)는 원래 학교 선생이었는데 그곳이 문을 닫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고, 고향으로 내려와 유치원 교사를 하게 됐다. 아마도 실직이 부인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테고, 이혼과 함께 아들 마르쿠스와도 떨어져 지낸다. 항상 배려심 많고 아이들과도 잘 지내는 훌륭한 선생 루카스. 이젠 중년이 된 고향 친구들과 행복한 한때를 보내던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의 당사자가 되고 만다.



오랜 친구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테오의 딸 클라라가 루카스의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특히 상상력이 풍부한 클라라의 말 한마디가 그를 아동 학대 성범죄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큰 충격을 받은 클라라의 엄마 아그네스는 물론이고 믿었던 테오까지 루카스를 비난하는 상황, 유치원 원장 그레테는 그를 경찰에 신고하고 루카스는 하루 아침에 고향 사람들로부터 혐오스런 인간말종 취급을 당하게 된다.


적당한 두려움과 편견 · 무지와 집단논리로 유지되는 '선량한 시민'의 판타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허망하게도,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이 작품 속에서 마치 맥거핀과 같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처럼, 그 총알이 발사된 이유나 총알을 발사한 장본인 또는 총알이 향한 대상은 어쩌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사냥이 당연시되는 분위기,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상황, 아무런 사과나 해명 없이 적당히 무마되는 현실이 더 근원적인 문제일 수 있다.



또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비롯해 사회 곳곳에 강고하게 박혀 있는 다양한 종류의 고정관념이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합리성을 훼손시킨다. 아직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편견에 사로잡혀) 섣불리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버리는 경우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할 가능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기억과 관련된 인체의 신비에 대해 인류는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으며, 수많은 연구에서 밝혀진 대로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성인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사고과정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는 많고, 피해자와 가해자 · 목격자와 조사자도 결국 다 인간이기에 어떤 사건이든 우리는 항상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피해자의 말이 모두 다 사실은 아닐 수도 있고, 약자라고 해서 모든 이가 다 선하지는 않다.



그리고, 각종 두려움으로 인해서도 진실은 자주 왜곡된다. 자신의 이전 행동에 착오가 있었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 겪게 될 시련 ·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부 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 · 자기가 알고 있었던 내용이 틀릴 수도 있다는 염려 등은, 우리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만든다. 특히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서가 어떤 계기를 통해 강하게 표출될 때는 그에 반하는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루카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집단 린치를 가하는 고향 사람들은 딱히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선량한 시민'이며, 우리와 똑같은 보통의 인간이다. 평범한 그들이 비이성적인 폭력을 저지르게 된 이유 역시 편견과 무지, 두려움과 집단논리 때문일 것이다. 비단 이 작품에서만 그런 광기가 나타나는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인간 집단이 그런 식의 야만적 행태를 보인 사례는 무수히 많다.



야만은 야만을 불러오고, 폭력은 폭력을 가져온다. 그렇게 잘 참고 배려심 많던 루카스도 막판엔 폭발하고 만다. 그 역시 한낱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헌트'의 클라이막스 장면인 성당에서 루카스의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메인 포스터에 등장하는 저 눈빛이야말로 각본과 감독을 겸한 토마스 빈터베르그와 이 영화의 '화룡점정' 매즈 미켈슨이 보여주고자 했던 진실이 아닐까?


결국 이 눈빛의 진실이 이 작품을 결말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하나의 사실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편견과 무지, 두려움과 집단논리가 팽배해 있다. (루카스를 집단 린치했지만) 여전히 선량한 시민인 고향 친구들은 사냥을 나서고, 상황에 따라서는 누군가를 죽여도 되며, 아무도 책임 지지 않는 현실은 그대로다. 우리가 진실의 추구를 게을리 하면 언제라도 제2, 제3의 루카스 같은 희생양은 나타날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절대 해피엔딩이 아니다. 루카스는 아들 마르쿠스와 웃고 있지만, 사냥을 하면서 웃고 있다. 항상 사냥은 다시 시작되고, 오늘의 가해자가 내일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진실이 우리를 구원할 테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간은 불완전하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명하고 냉정하게 '진실'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설사 그 진실이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진실은 누군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진실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기에.


한국에서는 영화가 아니라 일상


2015년 10월 8일 오후, 용인의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50대 여성이 위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아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딱히 목격자도 없었고, 특별한 단서도 없이 그저 벽돌 하나와 '피해자가 당시 고양이집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만 확인된 상태였다. 당시에 밝혀진 사실만 놓고 보면 그 벽돌이 실수로 떨어진 건지 아니면 누군가 고의로 던진 것인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경찰 입장에서는 어차피 마땅한 단서가 없으니 일단 벽돌과 고양이집을 바탕으로 수사를 벌이기는 했지만, 좀 더 엄밀히 따져 보면 길고양이 문제 자체가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지의 여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설사 고의적인 범죄였다고 하더라도, 범인이 과연 피해자가 '캣맘'이어서 벽돌을 던졌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로 그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한국언론에서는 '캣맘 혐오증'이라는 표현까지 기사 제목에 붙여서 사건을 한쪽으로 몰아갔고, 사람들은 길고양이 문제와 관련해 여기저기서 극심한 반감을 드러냈다. 아직 사실관계가 거의 밝혀진 것이 없는데도, 인터넷 상에서는 고양이 애호가와 그외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사건은 11살 어린이의 어처구니 없는 잘못으로 밝혀졌고, 결국 '캣맘 혐오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진실은, 누군가가 바라는 모습대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더 헌트'를 보면서 '벽돌낙하로 인한 50대 여성 사망사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역시 실체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버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캣맘 살인사건'은 진실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고, 동물복지를 외치는 이들과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갖 경멸과 분노의 언어들이 난무했다. 이들과 영화 속에서 집단 린치를 행한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다를까?


만약 이때, 누군가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면 그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현실의 루카스'가 되어 악마화되고 마녀사냥을 당했을 것이다. '더 헌트'의 배경이 한국이었다면, 루카스가 단 1년 만에 그렇게 웃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획일성과 이분법, 집단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다수의 잘못을 바로잡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리고 강남역에서부터 어느 섬마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쉴새없이, '분노사회'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식의 사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당장 우리들 중에 누가 희생양이 될진 모르지만, 헬조선에서는 사건의 진실과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기보다는 그저 한 개인을 악당으로 만들어 비난하고 매장시키는 게 훨씬 더 익숙하다. 매일같이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이불밖은 위험해"가 기정사실화된 지도 오래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루카스인 경우보다는 반대로 그의 고향 친구들인 경우가 더 많겠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루카스가 됐을 때 과연 우리는 그처럼 진실을 보여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