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로부터 디즈니에게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최신작 [몬스터 대학교].
공교롭게도, 최근에 동양과 서양의 최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만든 최신작을 연이어 보게 됐다. 약 일 주일 전에 먼저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 <바람이 분다>를 봤고, 이번에는 미국의 유명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픽사(Pixar Animation Studio)의 작품 <몬스터 대학교>를 봤다. 단순하게 말해 일본의 '지브리'가 2D 셀 애니메이션을 대표했다면 미국의 '픽사'는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대표했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아마도 지구상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전체적으로 논할 때 동서양의 이 두 스튜디오를 완전히 빼놓고는 그 누구도 제대로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지브리와 픽사는 거의 흥행 보증수표였으며, 작품성에 있어서도 모두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기도 했다. 전세계의 영화계는 흔히 말하는 세계 3대 영화제(베니스, 칸, 베를린)와 헐리우드의 아카데미 영화제를 나눠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인데, 미국의 픽사 스튜디오는 아카데미에서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여러 번 수상했고,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는 실사 예술영화가 장악하고 있는 베를린과 베니스에서 작품상과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2003년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애니메이션상을 받았을 때를 전후한 시기가 지브리 스튜디오의 최고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다르듯, 지브리와 픽사는 창작 방식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를 중심으로 모든 걸 세팅한다면(1인 주도의 기획, 각본, 연출), 픽사 스튜디오는 스토리 구상 단계에서부터 개방적인 '집단 창작'으로 유명하다(다수의 기획, 각본, 연출 참여). 이런 차이는 어쩌면 일본의 수직적인 문화와 미국의 수평적인 문화에서 일정 부분 기인하는 것이기도 한 듯한데, 바로 이 지점에서 지브리와 픽사 전성기의 최대 장점이 나오기도 했지만 또 역설적으로 현재 쇠락기에 접어든 두 스튜디오 위기의 원인 역시 여기서부터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12년 전의 <몬스터 주식회사>와 최신작 <몬스터 대학교>는 물론 같은 픽사지만, 확실히 뭔가 바뀐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잘 보여준다.
모든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훌륭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라고 한들 정점을 찍은 뒤에는 어쨌든 밑으로 내려오기 마련이다. 얼마 전에 나이 많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를 공식 발표했고, 지브리의 최근작들 몇 편은 예전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함으로써 분명한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72세) 개인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노화와 창작 능력 감퇴가(<바람이 분다>에도 일맥상통하는 대사가 나온다) 그리 밝지 않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현재와 미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픽사도 비슷하게, 이 스튜디오가 가장 강조했던 특징인 집단 창작이 오히려 지금은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픽사의 역사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디즈니와의 협업과 스티브 잡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원래 3차원 컴퓨터 그래픽과 관련된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를 개발하고 판매하는 회사였다. 한동안 애플 컴퓨터에서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가 1980년대 중반 이 회사를 천만 달러에 사들였고, 하드웨어 판매 부진 속에서도 홍보를 위해 제작한 짧은 애니메이션들은 큰 호평을 받았다. 예전부터 수많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던 디즈니(The Walt Disney Company)도 픽사의 기술력을 이용했는데, 이렇게 시작된 픽사와 디즈니의 관계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 픽사가 하드웨어 부문을 정리한 뒤 두 회사는 본격적인 파트너십을 맺었고, 드디어 <토이 스토리>의 대성공을 출발점으로 해서 약 10여 년간 기획·제작(픽사)과 홍보·배급(디즈니)의 찰떡궁합을 자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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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몬스터 주식회사(Monsters, Inc.) - ![]() 데이비드 실버맨 외 감독, 빌리 크리스탈 외 목소리/월트디즈니 |
- 픽사 스튜디오의 장편 애니메이션 목록
1. 토이 스토리(Toy Story, 1995)
2. 벅스 라이프(A Bug's Life, 1998)
3. 토이 스토리 2(Toy Story 2, 1999)
4. 몬스터 주식회사(Monsters, Inc. 2001)
5.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 2003) -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6. 인크레더블(The Incredibles, 2004) -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7. 카(Cars, 2006)
8. 라따뚜이(Ratatouille, 2007) -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9. 월-E(Wall-E, 2008) -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10. 업(Up, 2009) -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11. 토이스토리 3(Toy Story 3, 2010) -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12. 카 2(Cars 2, 2011)
13. 메리다와 마법의 숲(Brave, 2012) -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
14. 몬스터 대학교(Monsters University, 2013)
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를 추구하는 픽사와 전통적 안정성을 중시하는 디즈니는 2005년을 전후해서 불화설에 휩싸이게 되고, 급기야 두 회사가 갈라서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때에도 '거물' 스티브 잡스는 픽사의 대주주였고, 바로 다음해인 2006년에 디즈니는 스티브 잡스를 자기들의 최대 '개인'주주로 받아들이는 한편 자그마치 74억 달러를 들여 픽사를 인수하게 된다. 픽사를 품은 디즈니 · 디즈니의 품에 안긴 픽사는 이후에도 계속 훌륭한 작품들을 쏟아냈고, 서로의 장점은 여전히 빛을 발했다. 연거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으며, 엄청난 흥행과 함께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다가 2011년에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고, 어찌된 일인지 '애플(Apple Inc.)'처럼 '픽사'도 하향세에 접어들게 된다.
집단 창작을 통해 이어온 픽사의 명성
픽사는 처음 <토이 스토리>를 쓰고 다듬는 데에 무려 36개 월이 걸렸다고 한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픽사는 '스토리텔링'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튜디오이고, 스토리를 만들 때에는 해당 프로젝트와 관련된 다수의 작업자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난상토론을 통해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이는 다른 헐리우드 스튜디오 관계자들이 각자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한 것과는 많이 다르며, 픽사의 작업자들은 그 누구도 해고될 걱정을 하거나 관계를 망칠까 봐 걱정함이 없이 마음껏 비판하고 피드백을 주는 걸로 유명하다. 픽사 구성원들의 관심은 오직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고, 이를 위해 모두 모여서 자기들의 실수를 함께 고쳐 나간단다. 이게 바로 세계 최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의 집단 창작 방식이다.
[요즘에는 이런 집단적인 작업 방식을 이용하는 스튜디오들이 꽤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픽사가 디즈니에 인수되고 몇 년이 지나자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듯싶다. 디즈니와 픽사가 각자의 장점을 스스로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서로 닮아가려고 애쓰는 것이다. 디즈니는 과거 자신들의 명성을 뛰어넘는 픽사의 성공을 지켜보며, 괜히 안하던 짓(가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교훈적인 해피엔딩을 벗어나 뭔가 편견을 깨뜨리고 반골 기질이 다분한 캐릭터가 주인공인 작품)을 자꾸 하려고 한다. 또 픽사는 픽사대로 모회사인 디즈니의 눈치를 보며, 원래 자신들이 가졌던 강점을 희석시키고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디즈니 따라하기(대표적으로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 열중하게 된다. 이럴 거면 과연, 디즈니 자체 제작 스튜디오와 픽사 스튜디오가 따로 작품을 발표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픽사의 집단 창작 방식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픽사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디즈니의 자회사로 편입된 뒤에는 전체 작업자들 중에 단 몇 명이라도 디즈니를 신경 쓰기 시작하면, 디즈니와는 다른 픽사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자꾸 훼손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 하나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디즈니의 색깔이 틈입할 여지가 계속 발생한다는 말이다. 만약 픽사에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거장이 존재하거나 아니면 스티브 잡스 같은 든든한 방패막이가 있다면 이런 건 많이 상쇄되겠지만, 픽사는 현재 둘 다 없으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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