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드레서로 되돌아온 도리스 도리, 줄거리로 되돌아보는 파니 핑크

다른 여러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가 중에도 성별이 여자인 사람은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다. 그 중에서도 영화감독이라는 분야는 상당히 여자와 남자의 불균형이 심한 듯한데, 한국만 봐도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감독이며 여자감독이라고 해봐야 겨우 양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참 좋은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 감독이 여자라고 하면 기억에 좀 잘 남는 것 같다.

이 포스트에서 이야기할 독일의 영화감독 도리스 되리(Doris Dörrie, 1955~ )도 여성인데, 우리에게는 파니 핑크로 알려져 있는 <Keiner liebt mich(Nobody Loves Me, 1994)>를 원안, 각본, 감독한 걸로 유명하다. 도리스의 이제까지 작품들과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도리 감독은 매우 스타일리쉬하고 명석한 여성이고, 그녀의 모습만큼이나 멋진 영화들을 꾸준히 여러 편 만들어왔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독일여성들은 자립심도 강하고 여성성과 남성성이 꽤나 잘 어우러져 있는 것 같다. 독일 여배우나 한국에 온 독일여자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독일에서 살다가 들어온 한국여자까지.. 독일의 실질적인 수장인 총리도 여성이다. 한국엔 언제쯤에나 당당한 여성대통령이 나올까?]


이번에 Doris Dorrie의 최근작 <헤어드레서(Die Friseuse, The Hairdresser, 2010)>가 7월 14일에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전작들처럼 참 괜찮은 영화인 것 같아 벌써부터 많이 설렌다. 그래서 예전에 아주 좋게 본 작품인 <파니 핑크>가 다시 생각났고, 이 영화의 줄거리를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아마 나처럼 파니 핑크를 인상 깊게 본 사람들이 많을 텐데, 특히 20~30대 미혼 여성들이 보면 여러 모로 느끼는 게 많은 작품일 듯싶다. 또 이 영화의 주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전설적인 프랑스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 Edith Giovanna Gassion, 1915~1963)의 명곡 'Non, je ne regrette rien(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도 정말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 유명한 곡을 들으면서, 우리의 <파니 핑크(Keiner liebt mich, Nobody Loves Me, 1994)>를 다시 추억해보자.

Edith Piaf - 100 Chansons - 10점
에디뜨 피아프 (Edith Piaf) 노래/이엠아이(EMI)

Edith Piaf - Non, je ne regrette rien

파니 핑크 (Keiner Liebt Mich, Nobody Loves Me, 1994)
독일 | 104 분 | 드라마, 판타지 | 원안, 각본, 감독 : Doris Dörrie


1.
“저는 파니 핑크입니다……… 못 하겠어요… 나 자신을 이렇게 팔 순 없어요. 여자의 행복에 꼭 남자가 필요한 건 아니죠. 하지만 올해 서른이 되고… 혹시 이런 말 아세요? 여자가 서른 넘어서 결혼할 확률은 원자폭탄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 전 혼자 살아요. 한 4년 정도 됐죠. 아주 좋아요. 그래요! 혼자 사는 게 좋아요. 하지만 원했던 건 아니에요. 사귄 남자가 둘 있었죠. 두 번째 남자와 헤어진 후 에이즈 검사를 받았는데… 음성이었죠. 그 후 아무도 안 만났어요. 그 후 만난 남자들은 결혼했거나 호모였어요. 더 이상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죠. 정말 낭비죠. 커피나 마시러 가고, 첫 시작은 항상 커피 한 잔으로 이루어지죠. 밥 먹으러 가고, 얘기하고, 같이 자고… 모든 게 다시 시작됐죠. 담배 피우고, 속옷을 사고, 헬스 클럽도 다니고, 냉장고엔 항상 맥주를 채워두고, 남자의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고양이를 거북이로 바꾸고, 그러고 나면… 남자는 너무 가까워진 것을 겁내기 시작하죠. 그리 매력적인 얘긴 아니죠? 나 자신 조차도 날 사랑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2.
공항 검색원으로 일하는 파니 핑크.

“잘 생길 필요 없어요. 키도 나이도 상관 없어요. 담배나 술 안하고, 의료 보험만 보장되면 돼요. 이게 너무 큰 바람인가요? 물론 자기 집은 있어야 해요. 내 물건이 다른 사람 집에서 굴러 다니는 건 싫어요.”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게 된 오르페오. 갑자기 멈춰선 엘리베이터 안에서
불안해 하는 파니 핑크. 오르페오가 뭔지 모를 이상한 춤을 추자 신기하게도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오르페오 드 알타마 : 미래를 보는 점성술사 – 919호’
같은 층 913호에 사는 파니 핑크. 혼자서 자기 암시를 하며 외로움을 견딘다.

“나는 강하다. 나는 아름답다. 나는 똑똑하다. 난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

3.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이라는 모임에서, 자신의 관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오는 파니 핑크. 관 속에 누워있다가, 문득 오르페오가 생각나서 찾아간다.

“뭐랄까… 내 삶이 레코드판처럼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한 줄, 한 줄씩… 나 자신이 그걸 느껴요. 레코드 바늘이 어디쯤 있을까요? 끝부분? 중간쯤? 아니면 이미 끝난 건지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제가 알고 싶은 건, 제게 과연 대화 상대가 생길까 하는 거예요. ‘날씨가 너무 좋아’, ‘열쇠 잊지마’ 같은 말을 나눌 수 있는… 아니면 이런 말을 듣고 싶어요. ‘파니 핑크, 내 인생엔 네가 필요해’ …”

오르페오는 ‘30대 초반, 큰 키, 긴 금발, 푸른 눈에 비싼 양복, 검은 차’를 곧 만날 거라고 알려 준다. 그러면서 운명의 숫자 23이 그 사람과 맺어 줄 거라며, 파니 핑크가 먼저 주도해서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 기회라고…

4.
동성애자, 오르페오. 몇 달치 집세가 밀려, 돈이 필요하다고 애인에게 말하지만 거절 당한다. 건물 수리를 한다며 새로 나타난 건물 관리인, 로타 슈티커. 그는 30대 초반이며 큰 키에 긴 금발, 푸른 눈에 비싼 양복, 검은 차를 가지고 있다. 그 차의 번호판 숫자가 2323인 것을 본 파니 핑크. 모자를 눌러 쓰고 눈을 질끈 감고는, 자신의 차를 그 남자의 차에 들이 받는다. 결국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된 파니 핑크와 로타 슈티커. 서로 통하는 면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5.
로타 슈티커와 가까워지려고 하는 파니 핑크. 그러나 실수를 하고 의기소침해진다.

“난 너무 바보 같아요. 미숙하고, 창피하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난 멍청한 여자예요. 너무 나이도 많고…”

돈을 받고 파니 핑크를 도와주는 오르페오. 돈을 모아서 조금이나마 집세를 내고, 더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로타 슈티커를 찾아가 부탁하지만, 그는 돈이 모자란다며 매몰차게 거절한다. 게다가 애인도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하고, 오르페오는 실의에 빠진다.

6.
작가인 파니 핑크의 엄마. 딸의 집으로 찾아와, 더 늙기 전에 젊음을 마음껏 누리며 즐겁게 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고 있는 파니 핑크의 곁에 로타 슈티커를 두고, 자신은 딸의 집을 나선다. 잠에서 깨어나, 로타 슈티커의 옆에 눕는 파니 핑크.

“미리 얘기 할게요. 당신이 실망할까 겁나요. 섹스에 있어선 난 좀 바보예요. 시간이 필요해요. 머리가 방해하거든요.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돼요. 냉장고에 남아있는 우유의 유통기한이나, 연말정산에서 세금을 얼마나 돌려 받을지, 아니면 발 냄새가 나진 않을지… 내 모습이 지금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죠. 내가 너무 무겁지 않나 신경 써야 하고… 시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인내도요. 작은 소리도 내겐 방해가 되죠. 음악조차도… 내가 원하지 않는단 얘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원하지만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7.
“오르페오, 나 너무 행복해. 소리 지르고 싶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 나 말야… 나 말야, 정말 용감해졌어. 아름답고, 강하고, 똑똑하고, 사랑하고 사랑 받아!”

로타 슈티커와 진짜 연인이 됐다고 생각하는 파니 핑크. 그러나 로타 슈티커가, 자기와 같은 직장의 절친한 유부녀 친구와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혼자 있고 싶어 ……… 네가 아니었음 그 사람 사랑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만 가! 혼자 있고 싶어… 오르페오…”

 

8.
모임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에서, 관에 들어가 땅에 묻히는 체험을 하는 파니 핑크. 애인에게 버림 받고 집에서도 쫓겨난 오르페오는, 자신이 죽을 때, 외계 혹성에서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올 거라는 이상한 말을 한다. 곧 떠날 거라는 오르페오를 위해, 돈을 빌려 금괴를 사주고, 비싼 양복을 다림질 하고, 같이 목욕하고, 면도를 시켜주며 끝까지 함께 있는 파니 핑크. 어느 날, 때가 됐다고 말한 오르페오는 자신이 아끼는 반지만 그녀에게 남겨둔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9.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에서, 자신의 묘비를 만드는 파니 핑크.

“오르페오… 내 말 들려? 보고 싶어. 너무 많이… 지금 내가 혼자 있는 게 좋아?”

직장에서는 친구와 화해하고, 집에서는 오르페오의 짐을 정리하는 파니 핑크. 로타 슈티커는 건물 수리를 끝마치자, 건물의 기존 세입자들을 모두 내보내고 새로운 사람들을 들이려고 한다. 역시 쫓겨나게 된 파니 핑크, 다른 세입자들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다가 갑자기 멈춰 선 엘리베이터에 갇힌다. 오르페오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췄던 춤을 똑같이 추는 파니 핑크. 이번에도 신기하게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10.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올라온 세입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그들과 커피를 마시는 파니 핑크. 그들 중에, ‘스스로 결정하는 죽음’의 모임에 같이 참석했던 한 남자. 그는 그녀와 사귀고 싶었는데, 수줍음이 많아서 망설이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남자의 런닝에 크게 써있는 숫자 23. 파니 핑크는 자신이 만든 관을 집 밖으로 던져 버린다.

파니 핑크 - 10점
마리아 슈라더 외, 도리스 되리/AltoDVD (알토미디어)

이렇게 도리스 되리(Doris Dörrie) 감독의 1994년 걸작 파니 핑크(Keiner liebt mich, Nobody Loves Me)의 줄거리를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곡 'Non, je ne regrette rien'과 함께 찬찬히 둘러보았다. 요즘 한국의 젊은 여성들도 영화 속의 파니 핑크처럼 많이 외로워하는 것 같고 또 한국의 로타 슈티커도 어김없이 나타나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오르페오 같은 이를 만나기는 참 어렵다는 것이다. 성별이나 성적 취향을 떠나서, 정말 사람과 사람으로서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편견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여자와 남자를 구별하는 데에만 너무나 심하게 열중하고 있는 듯하다. 타인의 취향이나 살아가는 방식에도 지나치게 많은 참견을 하고, 조금만 다수의 틀에 맞지 않으면 따돌리고 업신여기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 속에서는 원래 오르페오 같던 사람도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이고, 겨우 견디던 사람도 결국 이 사회를 떠나고 말 것이다. 그러니 2011년 한국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이성애자 미혼녀 파니 핑크도 무척 외롭고, 동성애자 미혼남 오르페오도 너무 괴로울 수밖에.. 오~, 세계에서 제일 불쌍하고 각박하게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여!

아무튼, 도리스 도리의 최근작 <헤어드레서(Die Friseuse, The Hairdresser, 2010)>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나름대로 기대감에 차서 포스팅한 파니 핑크의 줄거리 이야기는 여기서 마친다. 부디 이 영화의 결말처럼 모두 해피엔딩을 맞이 하시길..



The Story of ART

Posted by 아서정 Arthur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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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lice 2011.07.03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참 감명깊게 봤던 영화예요 :)
    이렇게 줄거리로 다시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나는게 좋네요
    헤어드레서도 기대되구요 :)

    • 아서정 Arthur Jung 2011.07.03 14: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영화를 같이 좋아하는 분을 만나니 참 반갑네요^^
      한국 서울에는 지금 비가 많이 옵니다..
      이렇게 제 블로그를 방문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Alice님 블로그도 구경 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