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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불법사이트의 문제가 아닌, 기본 철학의 문제


지난 1월 말에 정부가 24조 원 규모의 23개 사업을 예비타당성 조사(예타,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공공사업인 경우 불필요한 사업으로 예산이 낭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업 착수 이전에 우선 타당성을 검증해 추진 여부를 판단하는 제도) 면제사업으로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했다. 안 그래도 선심성 예산 논란이 자주 벌어지고, 추진 과정에서도 사업성이 떨어져 재정부담을 주는 일이 적지 않은데, 예타마저 면제되면 세금 낭비의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23개 중에는 예전에 이미 예타에서 탈락한 사업도 7개가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이번 예타 면제는 절차와 방식에 있어서도 커다란 문제를 드러냈다. 그저 어느 지역에서 무슨 사업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데에만 중점을 둔 채, 결정 과정 자체에서 예타 면제의 뚜렷한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고 그 기준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엄연히 중요 국가시스템으로 예타제도가 존재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정권이 직권으로 이를 무력화 시킨 셈이다. 만약 예타제도에 허점이 있다면 이를 정식으로 개편하면 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의견수렴이 될 텐데, 그런 절차 없이 그냥 편의적으로 우회해 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문재인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조차 "이명박도 이렇게는 안 했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정부가 결정사항을 통보하듯이 발표하고 마치 조선시대처럼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예타 면제를 확정지었는데, "지역 균형발전에 꼭 필요한 사업들"이라면서 "4대강 개발식의 SOC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그리고,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추가적인 예타 면제를 언급했다). 물론 예타 면제 자체도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식의 독불장군식 행정은 기본적으로 문재인 정권이 내세운 방향성과도 맞지 않는다.


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인 정부"를 표방하고 있으며, 소통과 투명성을 그토록 강조하던 문재인 정권이 전혀 투명하지도 않고 소통도 하지 않는 일처리를 한 셈이다. 어차피 대규모 공공사업은 각 사업마다 최소 몇 년 이상씩 걸리고 때론 10년이 넘기도 하는데, 굳이 이렇게 급하게 예타 면제를 확정지을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현재로선 실질적인 경기부양 효과도 불확실하고 설사 효과가 좀 있다한들 결국 이전의 토건경제를 반복하는 건데, 이렇게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정권의 방향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추진할 이유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예타 면제에 이은 인터넷 검열


사실 예타 면제는 무척 중요한 사안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일반 국민들이 체감하는 일상생활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문제다. 어쨌든 사업이 실제로 진행되고 뭔가 눈에 보이는 게 있어야 실감하는 부분인데, 인터넷 검열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2019년에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아도 불편을 느끼지 않을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이제 인터넷은 일상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고, 누군가의 인터넷 검색기록과 방문사이트만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개인정보보호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이고,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지의 여부는 현세대 인간들의 행복에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이 불법사이트 차단을 이유로 각 개인의 인터넷 사용을 검열하고 있다. 이는 굉장히 중대한 사안이고, 최대한의 사회적 합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문제다. 또한 실효성에 있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고, 법적으로도 위헌·위법 소지가 다분하며, 개인의 사생활 침해 위험도 크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도 이와 관련해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근본적인 측면에서 무관하다고 보기 힘든 테러방지법은 국회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이뤄지기도 했다. 물론 기존에도 국내에서는 접근이 차단되는 사이트들이 있었고(검열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당연히 비판했다), 이번에 차단 방식이 좀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단 방식 자체에도 큰 차이가 있을뿐더러,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우선, 기존에 특정 사이트를 차단했던 방식은 굳이 비유하자면 그 목적지(차단된 사이트)의 문앞에서 접속을 막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목적지에 들어가려는 여러 방문자들 중에서 한국에서 온 이들만 못 들어가게 막는 방식이다(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아무런 제한 없이 접속이 가능했다). 여기에서 핵심은 한국에서 접속했는지의 여부였고, 차단 방식과 우회 방법이 둘 다 단순한 편이었다. 반면, 이번에 도입된 차단 방식은 출발지(각 개인)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집앞에서부터 막아서는 것에 가깝다. 우리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즉각 확인해서(이용자가 현재 접속하고자 하는 주소를 보고 차단하는 방식) 아예 못 가게 만드는 셈이다. 불법사이트 접속을 확실하게 막을 수 있어서 더 좋은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방법, 기준, 발상 다 문제가 있다


앞서 사생활의 자유와 개인정보보호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번에 적용된 차단 방식은 완전히 이와는 반대의 길을 향하고 있다. 원래 이용자가 특정 사이트를 접속할 때는 최대한의 암호화가 진행되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인터넷 보안 종사자들은 이런 암호화의 허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각 개인의 집앞에서 목적지를 확인하고 차단하기 위해서는, 결국 암호화 되지 않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인터넷으로 주고받는 '보안접속 이전의 주소'를 엿보는 것(방통위가 말하는 SNI 필드 차단 방식)이고, 이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감청(통신 내용을 엿들음)'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는 "감청과는 무관하다"고 말하는데, 이번에 적용된 차단 방식의 기본원리를 살펴보면 이는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보안 허점을 이용한 차단 방식은, 원칙적으로 인터넷 보안을 증진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정부가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부적절한 행위란 게 너무나 명백하다. 어차피 새로운 보안기술이 적용되면 무용지물이고, 문재인 정권이 아예 대놓고 인터넷을 감시하며 독재를 펼치는 중국이나 러시아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면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식적인' 인터넷 감청 선례를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정권이 바뀌었을 때, 과연 무슨 논리로 감청·차단·사찰을 막을 수 있을지 큰 의문이다.


[한때 차단되었다가 현재는 접속 가능한 노스코리아테크 메인페이지 갈무리]


이미 우리는 2016년에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북한의 정보통신 기술 관련 이슈를 전세계에 전달하기 위해 외신기자(영국인)가 운영하던 웹사이트 '노스코리아테크(northkoreatech)'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접속차단 결정을 내렸다(이후 국정원의 작품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물론 2017년에 법원이 "차단 결정은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아무튼 우리는 국내에서 이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사이트가 '불법사이트'인가를 누가, 어떻게, 무슨 기준을 가지고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한국은 아직도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 과정을 전혀 갖지 못했다(현재 방통위는 차단 사이트 명단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냥 일방적 차단만 존재하는 왜곡된 구조이며, 향후 어떻게 악용될지도 알 수 없다.


위 경우 외에도 갑자기 차단됐다가 풀린 사이트들이 여럿이고, 다들 알다시피 일단 한번 생긴 제도는 없애기가 무척 어렵다. 박근혜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과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권도 그저 일시적인 통치를 할 뿐인데, 이렇게 문제점이 많은 제도를 무작정 실행하는 건 굉장히 무책임한 짓이다. 예타 면제를 발표할 때에는 "4대강 개발식의 SOC와는 다르다"고 하더니, 인터넷 검열을 하면서도 "이명박근혜 정권과는 다르다"고 할 셈인가? 어떻게 보면, 문재인 정권의 인터넷 검열은 이전 정권보다 더 고약한 구석도 있다. 이전 정권은 본격 시행 전에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문재인 정권은 (예타 면제처럼) 그냥 곧바로 실행해 버린 후 '나를 따르라'고 하니 말이다(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이명박근혜 정권은 헬조선, 문재인 정권은 네오조선?


이번 인터넷 검열이 시작된 건 2월 11일부터였다. 갑자기 사이트 접속이 안 되는 일이 발생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고 인터넷 서비스 업체에 항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이트 차단 사실을 국민들에게 명확히 안내하지 않은 것이다. 12일 오전에야 관련 보도가 나왔고, (각종 인터넷 게시판을 살펴보면) 11일 하루 동안은 다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며 반신반의하는 모습이 역력하다(제일 먼저 차단작업을 실행한 것으로 보이는 KT도 11일에는 이용자들의 문의에 그저 이리저리 얼버무리기 바빴다). 과연 이게 "국민이 주인인 정부"를 표방하는 정권이 말하는 민주주의인가? 전혀 투명하지 않았고, 제대로 소통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독불장군식으로 사이트 차단을 강행했는지 나중에라도 꼭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 동안 우리나라는 인터넷 검열국가'라는 오명을 썼다. 5년 전만 해도 중국의 인터넷 검열을 비판하던 한국이 지금은 동급이 됐다. 인터넷 세상에서만 보면 이명박 정부는 독재정권 ... 네트워크 세상은 기본적으로 자율적이어야 하며 이를 공권력으로 통제해선 안된다. 반드시 대한민국을 인터넷 자유국가로 만들겠다"

- 2012년 10월 15일, 판교 테크노밸리센터에서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문재인.


이런 식의 인터넷 검열은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한 공약과도 어긋나고, 이제까지 주창해온 정권의 방향성과도 맞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에 비해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장점이 방향성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를 배신하는 건 선거에서 표를 준 유권자들을 지극히 허탈하게 만드는 일이다. 독재국가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 촛불을 들었고, 그 반대편에 서있는 후보로 선택되어 권력을 잡은 게 바로 문재인 정권의 정체성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기존의 시대착오적 인터넷 차단 제도를 바꾸기는커녕 인터넷 검열을 오히려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중에 정권이 바뀌었을 때 벌어질 수도 있는 일들("2019년에 문재인 정권이 특정사이트를 차단할 때 이용했던 방식과 동일하게...")을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말이다. 


일부 언론이 보도한 바대로, 예타 면제에 실망한 국민들이 결코 적지 않다. "이명박근혜 정권과 다른 게 뭐냐?"라는 얘기도 이미 나왔고, 언제가부터는 2030세대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아무래도 인터넷 검열은 2030세대에게 민감한 사안일 텐데, 그냥 단순히 '불법사이트 차단'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건 너무 안일한 태도다. 일반 시민들은 어떤 사이트가 왜 차단됐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웹서핑을 한다. 사회적 합의와 적절한 방식을 거치지도 않고 그저 "나쁜 거니까 막는다"는 식의 전근대적 발상은 21세기 젊은이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지금이 무슨 양반들이 시키면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조선시대도 아닌데, 그런 일방적인 강요를 수긍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한마디로, 이번 인터넷 검열로 인해 젊은세대가 문재인 정권에 완전히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방향성을 상실한 문재인 정권의 오판이, 어쩌면 (유럽식 파시즘 확산이나 미국식 트럼프 당선의 토양이 되었던) 극단적 정치혐오의 시대를 불러올지도 모른다. '헬조선' 탈출을 위해 촛불을 들었는데, 또다시 '네오조선'으로 향한다면 국민들은 언제든 다시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The Story of ART

Posted by 아서정 Arthur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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