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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α

모차르트의 친구였으며 베토벤의 스승이었던 하이든, 그리고 비엔나

비엔나의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루트비히 판 베토벤.

18세기 말의 비엔나는 서양 음악사에서 정말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마치 17세기 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 시대의 로마가 서양 미술사에서 그런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이 때의 비엔나는 모든 서양 음악가들에게 꿈의 도시였으며, 그 자체로 Western Music의 역사를 만들어가던 곳이었다.

 

이것은 1780년대부터 1790년대까지 위대한 세 명의 음악가가 바로 이곳 비엔나에서 과연 무슨 일을 했는지만 봐도 금새 알 수 있다. 그 세 사람은 바로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1791년 12월 5일),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1827년 3월 26일)' 그리고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년 3월 31일~1809년 5월 31일)'이다.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순]

 

세 명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하이든은 귀족의 신하이자 후원을 받는,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중간 계급인 음악가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으며, 거의 30여 년 동안이나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 한 곳에 고용되어 충실히 음악활동을 했다. 성격도 낙천적이고 온화했다고 하며,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전체 음악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오래 산 편이고, 그래서 그런지 나이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Papa'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나이 차이가 24살이니 모차르트가 제 아무리 신동 소리를 들으며 아주 어릴 때부터 전 유럽의 주목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때 이미 하이든은 유명한 작곡가였다. 다른 예술가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기록을 찾기는 힘들지만, 아마도 20살도 되기 전에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만났을 것이며 둘은 서로를 단박에 알아 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모차르트는 성격적으로 좀 유별난 데가 있었지만, 이런 모차르트도 하이든에게만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역시 하이든을 'Papa'라고 불렀다.

 

모차르트 - 10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문학동네

 

저명한 유대계 독일 사회학자인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저서 <모차르트>를 보면, 당대의 대표적인 작곡가였던 하이든은 모차르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어린 모차르트를 깊이 경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것을 말로 분명하게 표현했던 하이든에게서 모차르트는 많은 것을 배웠으며, 두 사람의 친분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던 걸로 보인다.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연주하던 모차르트는 1780년대로 접어들자 비엔나로 오게 되고, 곧 하이든의 현악4중주에 관심을 보인다. 두 사람은 때때로 모차르트의 집에서 합주 시간을 갖기도 했는데, 모차르트가 비올라를 켜고 하이든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고 한다. 드디어 1785년, 모차르트는 3년 넘게 작곡해 온 자신의 현악4중주 6개를 하이든에게 헌정[Haydn Quartets, String Quartet No.14~19 (K.387, K.421, K.428, K.458, K.464, K.465)]한다. 이 작품들을 모차르트의 집에서 처음 들은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에게 모차르트를 극찬하고, 모차르트 역시 하이든을 향해 직접 헌정사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1787년 봄, 하이든보다는 38살이나 어리고 모차르트보다는 14살 아래인 한 소년이 난생 처음 비엔나를 방문한다. 6살에 이미 각국 귀족의 초청을 받아 연주여행을 떠날 정도로 유럽 각국에 명성을 떨친 모차르트에 비하면 별 것 아닐지 몰라도, 이 소년 역시 모차르트처럼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나름대로 두각을 나타냈다.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많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때 모차르트는 음악의 수도인 비엔나로 온 무명의 소년에게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젊은이를 주목하라. 그는 이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 천재 모차르트에게 이런 말을 들었던 이 아이가 바로 베토벤이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모차르트처럼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길 바랐고, 베토벤의 첫 연주회가 있었던 1778년에는 베토벤의 나이(8살)를 신동이었던 모차르트와 같은 6살이라고 속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양음악사 최고의 두 작곡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만남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베토벤은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서 그 곳을 떠나야 했고, 1792년이 되어서야 그는 다시 비엔나로 올 수 있었다. 알다시피, 모차르트는 1791년 겨울에 (지금은 그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알 길 없는) 도시의 외곽 묘지에 묻혔고, 런던에 있던 모차르트의 친구 하이든은 몇 개월 뒤에야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그렇지만 죽기 직전 겨우 한두 달 동안 모차르트는 작품을 세 개나 더 작곡했고, 35년의 길지 않은 일생동안 무려 630곡이 넘는 음악을 남겼다. 이는 약 80년과 60년을 산 하이든과 베토벤의 작품번호를 모두 합한 것과 거의 맞먹는 작품수이다. 결국 1792년, 하이든은 비엔나로 돌아왔고 베토벤과의 중요한 만남을 가지게 된다.

 

1792년은 역사적으로 무척이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우선 프랑스가 시민 대혁명을 이뤄낸 후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출발하던 해이다. 그리고 무명의 나폴레옹이 서서히 사람들 앞에 등장하기 시작하던 때이며,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이 미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기반을 닦던 시기이다. 이때 'Papa' 하이든은 음악계의 터줏대감으로서 전유럽에 걸쳐 최절정의 평판을 얻고 있었고, 드디어 비엔나에 와있던 청년 베토벤에게 가르침을 주게 된다.

20대 초반의 베토벤에게는 하이든 말고도 또 다른 스승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당시에 비엔나의 궁정악장이었던 '살리에리'이다. 높은 지위에 있던 그는 하이든과 같은 저명한 음악가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베토벤 뿐만 아니라 슈베르트와 리스트 역시 살리에리의 제자였다. 우리에겐 살리에리가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아 있지만, 그런 불명예스러운 소문들은 거의 다 픽션에 가까운 것들이다. 실제로 살리에리는 베토벤에게 있어 하이든 만큼이나 대단히 중요한 스승이었고, 악성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중에 가장 길게 살았던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친구로서 그리고 베토벤의 스승으로서 두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성격적으로 보나 세계관으로 보나 좀 유별난 데가 있던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운 편이었던 하이든은 귀족사회에서도 그런대로 잘 살아나갈 수 있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달랐다.

 

앞서 언급한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말처럼, 모차르트는 귀족사회인데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지위 변화와 자유를 갈구하던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였다. 모차르트와 세상과의 충돌은 그런 측면에서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 모차르트의 이른 죽음을 불러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명한 작곡가로서 갑자기 나타난 어린 모차르트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던 하이든은, 런던에서 비엔나의 모차르트가 요절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그 뒤로도 하이든은 18년을 더 살았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서로를 존경했지만, 그만큼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면, 베토벤은 어떨까? 베토벤은 그 누구보다도 운이 좋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시민혁명의 시대였다. 그토록 모차르트를 괴롭혔던 궁정사회는 더 이상 베토벤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혁명의 설레임과 흥분·변화의 힘찬 기운이 베토벤을 감싸 안았고 그는 자신의 세계관과 성격에 맞게 온전히 살아나갔으며, 또 그렇게 위대한 음악을 만들었다.

 

혁명을 이뤄낸 시민사회가 가진 최고조의 희망이 베토벤의 음악 속에 그대로 담겼으며, 그것은 지금까지 그 어떤 음악가도 베토벤을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영광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모차르트가 죽은 비엔나에서 그 바로 다음해에 베토벤의 스승이 된 하이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베토벤의 성공을 보며 그리고 시민사회의 성장을 보며, 혹시 모차르트의 이른 죽음을 더 안타까워하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