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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를 밝혀내는 통찰력,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로버트 트리버스

진화생물학을 토대로 한 기만과 자기기만의 일반이론, 그리고 인간의 생존과 번식.

 

우리가 아무리 외면하고 포장하려 해도 잘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책에다가 아무리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써놔봐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게 시작한다. 누군가가 아무리 '정의가 승리한다'라고 말해봐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의롭지 못한 상황과 대면한다. 애써 포장하려고 온갖 논리와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지만, 결국 남는 건 무심한 현실 속에서 껍데기만 남은 평등과 정의뿐이다. 어차피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볼 수밖에 없고,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두 발을 내딛고 서있는 이 세상 자체가 그런데, 어쩌겠는가?

 

단언컨대, 인간 사회는 거짓투성이다. 인간은 철저한 거짓말쟁이고, '기만(남을 그럴듯하게 속임)'과 '자기기만(스스로를 속임)'이 판친다. 굳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속이고 속는 건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도 무수히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원래 유전자로 이루어진 생물 전체적인 이야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화도 이뤄지며 자연과학적으로 연구와 분석이 가능하다. 자연과학은 보편타당한 일반 이론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므로, 인간의 기만과 자기기만에 관한 일반 이론 역시 과학적 연구와 분석을 통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2013)>는 "원리상 모든 종에 적용되지만 우리 종에게 더욱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이론이 바야흐로 나올 때가 되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책의 저자는 '살아 있는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로 평가 받는다는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 1943~ )'이고, 원제는 <The Folly of Fools: The Logic of Deceit and Self-Deception in Human Life (2011)>이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은 그의 최신작인데, 로버트 트리버스의 책이 국내에 출간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은이) | 이한음 (옮긴이) | 살림 | 2013
원제 The Folly of Fools: The Logic of Deceit and Self-Deception in Human Life (2011년)

 

사실 이 책은 어떤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책은 아니다. 상당 부분이 '아이디어' 단계에 머물러 있고, 전반적인 서술 방식도 논리적으로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는 일단 도발적인 화두를 던지는 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로버트 트리버스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들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고작 걸음마 단계를 시작하는 '미개척' 분야이고, 앞으로 엄청난 연구와 분석이 필요한 '과학'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쓴 내용 중 일부는 불가피하게 틀린 것으로 드러나겠지만, 나는 이 책에서 전개되는 논리와 주장들이 금방금방 수정되고 통합되어 더 심오한 자기기만의 과학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결국,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는 확실하게 정립된 일반 이론을 설명하는 과학 서적은 아닌 셈이다. 한글판 책 제목처럼 로버트 트리버스는 시종일관 우리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기만과 자기기만으로 가득차 있는 인간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독자와 함께 고민하는 스탠스를 취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세계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다. 이 문제에 관해 단순히 고민만 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례와 연구 분석 결과를 총동원해서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맨 앞에서 주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상당히 '논쟁적'이고, 또 그래서 상당히 흥미롭다.

 

그리고 Robert Trivers의 탁월한 직관력과 솔직한 자기고백(기만과 자기기만이라는 주제의 측면에서 볼 때, 특히 이 점이 중요하다)에도 불구하고, <The Folly of Fools>는 그리 쉬운 책은 아닌 것 같다. 이미 확립된 이론을 설명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기존에 지니고 있던 '자기기만'과 싸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과학 서적이기에 여러 가지 개념과 원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운 부분도 당연히 있다. 이 책은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1장~7장)는 이론적인 내용이라서 약간 더 읽기가 힘든 편이고 후반부(8장~14장)는 실재적인 내용이라서 그래도 좀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전체적인 분량도 거의 50:50이라서 전반부를 읽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생길 듯싶은데, 앞에서 이해가 잘 안 되더라도 그냥 후반부까지 죽 읽다 보면 뒤에서 저절로 이해되는 것들도 있다]

 

[Robert Trivers (이미지 출처: Scientific American)]

 

그럼 여기서부터는 본인을 포함해서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거짓말쟁이들'을 밝혀내는 통찰력의 핵심이 뭔지를 한 번 살펴 보도록 하자. 우선, 우리는 남을 더 잘 속이기(기만)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인다(자기기만). 인간에게 기만과 자기기만은 동전의 양면이며, 둘은 상부상조한다. 로버트 트리버스는 '진화생물학자(evolutionary biologist)'이므로,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는 이 주제에 대해 '진화'적으로 접근한다. 이 말은 기만과 자기기만이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애초에 이 책의 목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저자는 1장부터 7장까지의 전반부에서 상대적으로 자연과학적인 '편향'을 드러낸다(기만과 자기기만이 어떻게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는지를 여러 가지 개념과 원리를 통해 밝히고 있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The Folly of Fools) - 10점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 지음, 이한음 옮김/살림

1장 자기기만의 진화 논리
2장 자연에서의 기만
3장 신경생리학과 강요된 자기기만
4장 가정의 자기기만과 분열된 자아
5장 기만, 자기기만, 섹스
6장 자기기만의 면역학
7장 자기기만의 심리학
8장 일상생활에서의 자기기만
9장 항공 우주 재난과 자기기만
10장 거짓 역사 서사
11장 자기기만과 전쟁
12장 종교와 자기기만
13장 자기기만과 사회과학의 구조
14장 우리 자신의 삶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 

 

그런데, 로버트 트리버스는 또한 'sociobiologist(사회생물학자?)'이기도 하다. 영영사전에서 sociobiologist를 찾아보면, 'a biologist who studies the biological determinants of social behavior'라고 나온다. 간단히 번역하면 '사회적 행동의 생물학적 결정요인들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인데, 아마도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에서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진화생물학은 자연과학 쪽을 향하고 사회생물학은 사회과학 쪽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8장부터 14장까지의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후반부는 사회과학적인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결국 1장~7장은 자연과학적인 이론 중심이고, 8장~14장은 사회과학적인 실재 위주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첫 장을 읽고 난 뒤에는 거의 어떤 순서로든 읽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는 '과학' 서적이다. 이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모두 과학적 연구와 분석을 통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거짓말쟁이들'을 밝혀내는 통찰력의 핵심도 역시 과학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자가 책 분량의 50%를 할애해서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는 과학적 개념과 원리를 짧게 정리할 자신은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평소에 관심이 많은 '역사'와 '종교'에 관해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로버트 트리버스가 이 책에서 기만과 자기기만을 주제로 종교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굉장히 냉정하면서도 무척 공정하다. 자연과학적으로 근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사회과학적으로도 올바르다.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강압적인 대규모 성 노예제를 운영했다거나, 미국이 한국전쟁 때 한국인을 대량 학살했고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인과 캄보디아인과 라오스인을 대규모 살육했다거나, 터키 정부가 잘 살던 하위 집단인 아르마니아인들을 대학살했다거나,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시오니스트들이 인종 청소를 통해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상했다거나, 미국이 건국 때부터 아메리칸 인디언을 살육하고 대학살하는 기나긴 군사 행동을 벌였고 1980년대만 해도 대리인을 내세워 50만 명이 넘는 아메리칸 인디언을 살육했으며 한 세기 넘게 군사적 수단을 써서 신대륙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 등등..."

 

저자의 말대로, 역사학에는 과거에 관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과 거짓 역사 서사를 구축하려는 노력이라는 뿌리 깊은 모순이 담겨 있다. 대다수 역사가들은 기존의 자화자찬하는 이야기의 특정한 판본만을 말한다. 하지만 대개 모든 사회에는 과거에 관한 진실을 말하고자 애쓰는 극소수의 용감한 역사가들이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진짜' 역사가들을 통해 '불편한 진실'을 어느 정도나마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불편한 진실을 두 개만 들어볼까? 한국군의 베트남인 학살과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운용. 미군만 베트남인을 학살한 게 아니고, 일본군만 위안부를 운용한 게 아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기만과 자기기만은 한국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건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 살육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 부문에서 기만과 자기기만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듯, 종교에도 온갖 속임수의 메커니즘이 다 들어가 있다. 아니, 사실 추적이 가능한 역사보다도 증명 자체가 필요 없는 종교는 더 포괄적인 기만과 자기기만이 자리잡고 있다. 한마디로, 종교는 기만과 자기기만의 '결정체'다. 그렇다고 로버트 트리버스는 무조건 종교를 부정적으로 그리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플라시보 효과를 포함해서) 면역학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기도 하며, 집단내 협력 증진과 정신적 안정감 제공 등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비록 종교의 독선이 인류 최대의 비극인 전쟁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과학적으로 종교를 완전히 폄훼할 이유는 없으며 굳이 종교 공포증에 빠질 필요도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며, 개인적으로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자, 그럼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도록 하자. 종교와 역사를 비롯해 인간 세상에는 기만과 자기기만이 판치고 있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정의가 꼭 승리하는 게 아닌 것처럼, 인간은 철저한 거짓말쟁이고 우리 사회는 거짓투성이다. 심지어 기만과 자기기만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자연선택'을 받았고, 실제로 유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만·자기기만과 싸워야 할까? 우리 모두가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해왔다면, 도대체 이와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로버트 트리버스는 과연 어떻게 대답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

 

"나는 자신의 삶, 관계, 사회가 거짓말을 토대로 구축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 우리가 이따금 성폭행을 하고, 적당할 때면 침략 전쟁을 하고, 보상할 혜택이 따라온다면 자식을 학대하는 쪽으로 자연선택을 받아왔다는 점도 유념할 가치가 있지만, 나는 그런 행동들이 과거에 선호되었든지 여부에 상관없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 정직한 것, 혹은 정직하려고 애쓰는 것, 그리고 자기기만을 줄이는 것, 혹은 자기기만을 줄이려 애쓰는 것이 멸종으로 내몰릴 일이 없는 전략인 한, 나는 그것의 진화적인 장기 결과가 어떠할지 여부는 기꺼이 미래에 내맡기련다 ... 그것이 그저 진화적으로 안정한 한―아마 낮은 빈도를 유지하겠지만 소멸당하지는 않는 한―은 자기기만 반대를 내 인생관, 이른바 내면 전략으로 삼을 생각이다.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큰 희망을 품고 있어서가 아니다."

 

예전에 누군가도 이런 비슷한 말을 했다. 명분만 확실하다면, 나중의 결과에 지금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우리가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쓰고 '정의는 승리한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꼭 그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져서가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정의와 평등은 어쨌든 우리가 행동하는 데 있어서 확실한 명분이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양심에 따라 지향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인생관·내면 전략으로서 '정의는 승리한다'라고 말하고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쓰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기만과 자기기만에 대항해서 우리는 정직하려고 애쓰고 자기기만을 줄이려 애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이제까지 줄곧 '과학'을 얘기하다가 왜 갑자기 '철학'을 얘기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 속이고 속는 건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도 무수히 일상적으로 벌어진다고 말했고,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의 9장부터 12장까지는 항공우주재난·역사·전쟁·종교의 기만과 자기기만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항공우주재난·역사·전쟁·종교가 자연 상태에서도 그대로 존재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우리는 동물이기도 하지만 또 '인간'이다. 과학적으로 동물의 기만과 자기기만이 설명 가능하다고 해서, 인간 사회의 전쟁과 재난에 내재한 기만과 자기기만을 그냥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무튼 인간이고, 재난과 전쟁을 막기 위해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이자 사회생물학자인 로버트 트리버스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총동원하여 이 책을 집필한 것처럼, 우리는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거짓말쟁이를 밝혀내는 통찰력은, 과학에도 있지만 철학에도 있으니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