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과연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가?

 

2015년에 발표된 세계 국가 순위를 보면, 한반도는 국토 면적으로 볼 때 전 세계 250여 개가 넘는 전체 국가 중에서 85번째로 큰 나라이다. 하지만, 인구수로 보면 남부한국과 북부한국을 합쳐서 약 7천 4백만 명 정도이고, 이것은 세계에서 21번째로 많은 것이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국가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언어사용 인구수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한국어는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언어 중에서 중국어, 힌디어, 스페인어, 영어, 아랍어, 벵골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등에 이어 13번째의 사용 인구수를 자랑한다. 한 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러시아와 제일 인구수가 많은 중국 그리고 세계대전까지 일으켰던 일본 사이에서 우리는 이토록 끈질기게 생존해 온 것이다.

 

[출처: 네이버 검색 결과(CIA The World Factbook) - 세계 국가 면적, 인구 순위]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을 당했고, 어쩌면 한국어라는 것도 그냥 쉽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반만 년 역사를 보내는 지금 이 순간까지 힘겹게 생존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언어도 용케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여러 가지 다양하게 찾을 수 있겠지만, 하나의 훌륭한 언어로서 기본적으로 한글이 가진 뛰어난 자질도 분명히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한 나라의 국어사전은 단순 기록물이나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사전을 보고 어떤 어휘의 의미를 확인하고, 특정 사물이나 사항에 대해 개념화한다. 이전에는 그저 존재했을 뿐 사회적으로 불분명했고 몰이해 또는 무의미의 단계에 있었던 것들도, 사전에 정의됨으로써 마침내 확실히 자기 자리를 획득하게 되는 셈이다.

 

영어권 생활자들의 언어습관을 대변하는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현대영어에서 자주 쓰이는 1억 5천만 단어를 모아 분석하고, 매년 '올해의 단어'를 선정한다. 2013년 옥스포드 영어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 중에는 'Olinguito'라는 것도 있었다(Olinguito: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밀림에 사는 너구리과의 작은 종으로, 2013년 8월에 미국 소미소니언 연구소가 '신종' 포유동물로 확인함). 사람들은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올링기토에 대하여 사전을 통해 비로소 명확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이 끊임없이 새로운 단어를 분석하고 받아들이기를 게을리 하지 않듯이, 언어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언어가 얼마나 사회의 변화를 정확히 반영하느냐는, 아마도 그 언어의 가치와 생명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법칙과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혀 변화가 없는 언어라면, 그 언어는 말 그대로 죽은 언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출처: 연합뉴스]

 

'잎새', '푸르르다', '이쁘다' 등 표준어로 인정

 

이런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을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립국어원의 활동을 살펴보는 것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바로 어제 12월 14일, 국립국어원은 2016년 1월 1일자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반영될 '2015년 표준어 추가 결과'를 발표했다(총 11개 항목). 일단 그 내용부터 전체적으로 다 정리해 보고, 다음 얘기를 나누도록 하자.

 

 

○ 복수 표준어: 현재 표준어와 같은 뜻을 가진 표준어로 인정한 것(4개)

 

1. 마실 - '이웃에 놀러 다니는 일'이라는 뜻, '마실꾼 · 마실방 · 마실돌이 · 밤마실'도 표준어로 인정함.

2. 이쁘다 - 기존의 '예쁘다'와 함께 복수 표준어로 인정함. '이쁘장스럽다 · 이쁘장스레 · 이쁘장하다 · 이쁘디이쁘다'도 이제부터 표준어.

3. 찰지다 - 사전에서 ['차지다'의 원말]로 풀이함. (예문) 화단의 찰진 흙에 하얀 꽃잎이 화사하게 떨어져 날리곤 했다.

4. ~고프다 - 사전에서 ['~고 싶다'가 줄어든 말]로 풀이함. (예문) 그 아이는 엄마가 보고파 앙앙 울었다.

 

 

 

○ 별도 표준어: 현재 표준어와 뜻이 다른 표준어로 인정한 것(5개)

 

1. 꼬리연: 긴 꼬리를 단 연.

(가오리연: 가오리 모양으로 만들어 꼬리를 길게 단 연)

2. 의론(議論): 어떤 사안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제기함. 또는 그런 의견.

(의논: 어떤 일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 받음)

3. 이크: 당황하거나 놀랐을 때 내는 소리. '이키'보다 큰 느낌을 준다.

(이키: 당황하거나 놀랐을 때 내는 소리. '이끼'보다 거센 느낌을 준다)

4. 잎새: 나무의 잎사귀. 주로 문학적 표현에 쓰인다.

(잎사귀: 낱낱의 잎. 주로 넓적한 잎을 이른다)

5. 푸르르다: '푸르다'를 강조할 때 이르는 말.

(푸르다: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

 

 

○ 복수 표준형: 현재 표준적인 활용형과 용법이 같은 활용형으로 인정한 것(2개)

 

[출처: 국립국어원 공식 보도자료(2015/12/14)]

 

내년부터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준어로 반영될 항목들은 주로 실생활에서는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동안 표준어로는 인정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마실'이나 '찰지다' 같은 표현들인데, '이쁘다'와 '~고프다'에 대해서는 아마도 사람마다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저 오타나 줄임말 정도로 생각했던 부분이 정식 표준어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경우, '예쁜' · '싶은'처럼 원래 아름다웠던 표현에 괜한 오염이 생기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또 '마지막 잎새'라는 소설 제목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잎새'도 이번에 표준어로 인정됐다. 개인적으로 '의론'이라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듯한데 항목에 올라와 있어서 좀 의외였고, '푸르르다' 같은 다양한 표현이 반영된 게 이채롭다. 특히, 복수 표준형 2개 항목은 "탈락하기도 하고 탈락하지 않기도 함"이라는 국립국어원의 '공식' 설명에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탈락하기도 하고 탈락하지 않기도 하는 단어를 매번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갈팡질팡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기억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비판은 참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많이 존재한다. 전문서적에서 쓴 말을 (진정한 '풀이'에 대한 고민 없이) 그대로 가져다가 올려놓는 바람에 도무지 무슨 뜻인지 파악이 안 되는 전문용어들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어떤 표현의 역사나 문화적인 맥락에 대한 이해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국립'국어원이 일본사전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까지..

 

그리고 얼마 전에는 이런 촌극도 있었다. 지난 2012년 11월, 국립국어원은 표준국어대사전 속 '사랑'의 뜻을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개정한 바 있다. 이전에는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이성'이라고 썼던 부분을 '어떤 상대'로 바꾼 것이다. 언어가 시대에 따라 변한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때 사랑뿐만 아니라 '연인', '연애', '애인', '애정'의 뜻풀이도 모두 개정됐다. '남녀' 또는 '이성'으로 표현되었던 부분이 '두 사람' 또는 '서로' 등으로 전부 수정된 것이다.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에서 2013년과 2015년의 '사랑' 검색 결과]

 

하지만 2014년 1월, 국립국어원은 사랑의 뜻풀이에 '남녀'라는 표현을 다시 끼워넣었다. 1년 전 사랑의 사전적 정의가 바뀐 후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 같은 일부 보수 개신교 단체에서 항의 캠페인을 벌였고, 국립국어원이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한국교회연합이 2013년 10월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 "사랑 등 다섯 단어를 정의하면서 남녀 또는 이성을 모두 삭제하고 '두 사람'으로 수정함으로써 의미를 모호하게 하고 왜곡시키는 것은 동성애를 조장, 방조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수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결국 국립국어원은 조용히 내부 검토를 한 뒤 '사랑', '연애', '애정' 세 개 단어의 행위 주체를 남녀로 되돌렸다(나머지 두 개인 '연인'과 '애인'의 뜻은 사랑의 정의에 따라가기 때문에 그대로 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한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두 달 뒤에나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여전히 같은 '사랑'인데, 2013년과 2015년의 표준국어대사전 본문 내용이 다르다. 2013년에는 '이성애적 표현'이 없는 반면, 2015년 검색 결과에는 굳이 '남녀'라는 표현을 삽입한 게 보인다.

 

누구나 보면 알겠지만, 2013년의 표준국어대사전이 기록한 '사랑'의 사전적 정의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국립국어원은 단 1년 만에 자신들의 결정을 뒤집었다. 겨우 1년 만에 표준국어대사전의 내용을 다시 손댄 국립국어원의 일처리 자체도 문제지만, 이건 단순히 본문의 단어 하나가 바뀐 게 아니라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언어생활에서 마치 법전과도 같은 국어사전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고, 우리가 사랑·연인·연애·애인·애정을 생각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인식하기 쉬운 '이성 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꾼 셈이다.

 

 

2013년의 표준국어대사전 뜻풀이를 보면, 그 누구도 손해를 보는 사람 없이 그리고 의미 충돌 없이 보편적이고 포괄적으로 우리의 '사랑'을 잘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립국어원은 고작 일부 단체의 항의에도 맥없이 국어사전의 내용을 바꿔 버렸다. 현재의 표준국어대사전 뜻풀이는 동성애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 물론이고, 또 의미상으로도 적지 않은 충돌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2015년의 '동성애'는 뭔지 잘 모르겠다. 2013년에 동성애는 "동성의 연인 관계인 두 사람이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 뜻이 이상해져 버렸다. 도대체 2014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런 식으로 표준국어대사전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편하고 안정감 있게 언어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국립국어원은 우리의 소중한 한국어를 위해,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과연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 자문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도 한국어의 올바른 사용과 변화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모르게 쓸데없이 외국어를 섞어 쓰고 있지는 않은지, 또 마구잡이로 언어를 변형시켜서 괜한 혼란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우리 스스로도 고민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곧 2016년 1월 1일자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반영될 항목 11가지를 살펴봤는데, 저 중에서 무엇이 잘됐고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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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ART

Posted by 아서정 Arthur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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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6.30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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