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출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는 왜 'Beautiful'이 아닌 'Biutiful'인가.

 

중앙아메리카 북부에 위치한 '멕시코(Mexico)'는 원래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마야'나 '아즈텍'과 같은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야만적인 스페인의 침략으로 인해 오랜 역사를 가진 원주민의 문명은 일순간에 파괴되고 말았다. 16세기부터 약 300여 년 간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를 보냈으며, 독립 후에는 19세기 중반 영토 확장 야욕을 가진 미국의 침입을 받아 땅도 많이 잃었다. 결국 현재와 비슷한 멕시코-미국 국경이 확립되었고, (모든 전쟁과 식민지의 역사가 다 그러하듯이)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멕시코인들 중 60% 이상이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이라고 한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과 직접 맞닿아 있는 멕시코는 신자유주의 확대 및 북미와의 자유무역 실시로 인해 경제적인 예속이 점점 더 심해졌으며, 문화적으로도 큰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전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발달했던 영화계는 거의 몰락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빠지고 문화적인 예속도 가중되었다. 무분별한 민영화와 개방·공공 부문 붕괴, 경제적 예속과 깊은 관련이 있는 각종 범죄와 마약 산업 등 최근까지도 멕시코의 경제 문제나 복지 수준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었는데, OECD 통계 자료에서 대한민국이 부정적인 분야에서 수위를 차지하지 않는 경우의 상당수는 바로 멕시코가 더 나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21세기가 되면서 중남미 좌파 국가들이 전반적으로 약진하고 있으며, 본래 풍부한 지하자원과 노동인력을 가진 멕시코는 여타 유사한 신흥공업국들이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모로 긍정적인 전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작년에 새롭게 집권한 세력이 개혁 드라이브를 걸면서 고소득층과 대기업에 대한 증세와 친서민을 표방한 정책들도 펼치고 있고, 오랜 경기 침체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불안도 개혁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남미의 정통 좌파 입장에서 보면 이런 변화도 불만족스러운 게 사실이겠지만, 어쨌든 멕시코 역시 조금씩이나마 달라지고 있는 듯싶다. 어쩌면 몇 년 뒤에는 OECD 통계 자료에서 (지난 정권부터 역주행하고 있는) 대한민국과 멕시코의 위치가 좀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알폰소 쿠아론, 길예르모 델 토로]

 

멕시코 영화계의 새로운 기수, 멕시코의 세 친구(Trío de Amigos)

 

긴 암흑기를 지난 멕시코 영화계는 1960년대 초중반에 멕시코에서 태어난 세 명의 탁월한 감독으로 인해 몇 년 전부터 다시금 전세계 영화인들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요즘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그래비티(Gravity, 2013)>의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 1961~ )'과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비주얼리스트 <퍼시픽 림(Pacific Rim, 2013)>의 '길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1964~ )' 그리고 이번 포스트에서 소개할 영화인 <비우티풀(Biutiful, 2010)>의 제작·각본·감독을 맡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 1963~ )'.. 이 세 감독은 헐리우드를 비롯해서 전세계를 무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흥행뿐 아니라 비평적으로도 무척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이들은 실제로도 친분이 깊어서 말 그대로 '친구'라고 한다).

 

 

또한 이 세 감독의 스텝들을 보면 긴 세월 여러 작품을 함께한 이들의 이름이 자주 눈에 띄는데, 이들의 면면을 보면 멕시코나 남미 출신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그래비티>의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도 알폰소 쿠아론과 오랫동안 같이 작업을 해온 멕시칸이고, 길예르모 델 토로의 오랜 파트너로 유명한 <퍼시픽 림> 촬영감독 '길레르모 나바로' 역시 멕시칸이며, <비우티풀>의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들이 세 친구와의 작업으로 유명세를 탄 뒤에는 미국 등 멕시코 외의 지역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런 스텝들도 멕시코 출신으로서 멕시코 영화계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

<아모레스 페로스(Amores Perros, 2000)>
<21그램(21 Grams, 2003)>
<바벨(Babel, 2006)>
<비우티풀(Biutiful, 2010)>

 

비우티풀(Biutiful) - 10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하비에르 바르뎀 출연

 

- 길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크로노스(Cronos, 1993)>
<악마의 등뼈(El espinazo del diablo, 2001)>
<블레이드 2(Blade 2, 2002)>
<헬보이 1 · 2 (Hellboy, 2004 · 2008)>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El laberinto del fauno, 2006)>
<퍼시픽 림(Pacific Rim, 2013)>

 

-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ón)

<러브 앤드 히스테리(Sólo con tu pareja, 1991)>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1998)>
<이 투 마마(Y tu mamá también, 2001)>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Harry Potter and the Prisoner of Azkaban, 2004)>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
<그래비티(Gravity, 2013)>

 

 

비우티풀(Biutiful, 2010)
멕시코, 스페인 | 드라마 | 148 분 | 주연: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 욱스발 役)

각본,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

 

이들은 모두 굉장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데, 멕시코의 세 친구가 합심해서 '공동제작'한 영화가 바로 <비우티풀(Biutiful)>이다. 앞서 말했던 멕시코의 역사와 언어 때문인지 제작국가는 멕시코와 스페인이고, 영화의 배경도 현대의 스페인 바르셀로나이며, 전체 극을 이끌어가는 원톱 주연배우 역시 스페인 출신 유명 배우인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 1969~ )'이다. 전반적인 줄거리도 돈벌이를 위해 스페인에 들어온 중국과 아프리카 빈민들이 불완전한 법적 지위와 노동력 착취 때문에 고통 받고, 또 스페인 사람이긴 하지만 역사적 사건(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으로 인해 '이방인 아닌 이방인'의 삶을 살아온 한 남성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이 주인공의 아버지가 죽은 곳도 멕시코다).

 

영화의 기본 구도에서부터 왠지 멕시코와 스페인의 관계가 깊게 배어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고, 때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의 존재 자체가 멕시코와 스페인의 결합으로 가능했던 셈이다. 알폰소 쿠아론, 길예르모 델 토로 그리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과연 어떤 점에 매료되어 비우티풀을 제작하게 됐을까?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작품인 길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Pan's Labyrinth)>도 알폰소 쿠아론이 제작에 참여했고 영화의 배경도 스페인이며 제작국가 역시 멕시코와 스페인인데,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비우티풀'하게 만들었는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전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 그리고 그 속의 한 남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아마도 이 남자의 아버지는 스페인 내전을 겪은 프랑코 독재 정권에 의해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서 카탈로니아의 바르셀로나로 강제 이주됐을 테고(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직접 '공화파 의용군'으로 참전한 뒤 <카탈로니아 찬가(Homage to Catalonia, 1938)>라는 소설을 썼다), 태어난 아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독재를 피해 멕시코로 도망가야 했을 것이다. 프랑코는 카탈로니아 지역을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처럼 만들기 위해 강제 이주 정책을 폈겠지만, 문화적으로 상이한 카탈로니아 지역민들에게 이주민 가정은 (마치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인들의 관계처럼)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직접 쓴 제작노트 참고]

 

 

시간은 흘러 카탈로니아의 '이방인 아닌 이방인'들은 다시금 스페인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지만, 그러지 못한 이 남자(주인공)는 여전히 바르셀로나의 빈민가를 전전하고 있었다. 어른이 되고 자기 아버지처럼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룰 무렵, 이곳을 떠난 이주민들의 빈자리는 가난한 아프리카인과 중국인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스페인이 멕시코를 식민지로 삼은 300년 동안 벌어졌던 인종혼합이, 이제 이 남자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단 20~30년 만에 빠르게 진행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멕시코를 착취했듯이, 돈벌이를 위해 이곳으로 온 중국인들과 아프리카인들은 노동력 착취와 불완전한 법적 지위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이 남자는 그 사이에서 그래도 자신은 기본적으로 스페인 사람이기에 진짜 이방인인 밀입국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는 '인력브로커'로 살아간다.

 

이게 바로 영화 <비우티풀(Biutiful)>의 배경 설정이다. 그런데 국제뉴스를 보면 다들 알다시피, 이와 같은 모순은 비단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품 속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지만 일자리가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배를 타고 이웃 나라로 가던 밀입국자들이 배사고로 인해 수십 명씩 익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이주 노동자들이 집단 사망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한국도 절대 예외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 나오는 참혹한 풍경들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성격은 약간 다르지만, 더 악질적이게는 끝이 안 보이는 빈곤에 허우적거리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10대 소녀들에게 돈을 미끼로 강제 임신시킨 뒤 아기들을 매매하는 '아기공장(베이비 팩토리)' 조직도 적발된 사례가 있고, 요즘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인신매매로 팔려가고 있으며, 이렇게 납치 또는 매매된 아동들은 스페인을 포함해 유럽 전역에 공급된다]

 

[2013년 10월 6일 한겨레 기사 <죽어서야 유럽 오른 아프리카 난민들> 갈무리]

 

이런 비극 속에서, 주인공 남자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다름 아닌 인력브로커다. 어떻게 보면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들과 일맥상통하는 캐릭터인데, 작품의 공감 코드도 약간 비슷하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악한에 가깝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있는 주인공, 현실에서도 나쁜놈들이 참 많은데 그런 인간들 사이에 놓고 보면 그나마 최악은 아닌 인물. 욱스발에게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있고, 바깥에서 무슨 짓을 해서 돈을 벌든 아이들에게 그는 나름 헌신적이며, 흑인과 황인 이주 노동자들에게도 욱스발은 또 나름 인간적인 편이다. 비록 그 자신도 역시 거대한 착취 체계의 일원이고, 그런 '인간적' 활동조차 대부분 돈 몇 푼으로 이뤄질 뿐이지만..

 

왜 뷰티풀(Beautiful)이 아니라 비우티풀(Biutiful) 일까?

 

우리네 삶은 '그래서'일 때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일 때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이 작품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영화다. 욱스발은 말기암으로 인해 겨우 몇 개월의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에서 그대로 어린 딸과 아들을 부양하고 여러 아프리카인과 중국인의 인력브로커 노릇을 계속한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그래서 생의 마감을 위해 특별히 다른 걸 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자기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버지 욱스발의 보살핌이 절실하고, 이주 노동자들도 (사실 착취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스페인 사람 욱스발이 뒤를 봐주는 게 필요하다. 그는 변변찮은 아버지이고 시원찮은 인력브로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욱스발에게 운명을 걸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삶은 절대 '뷰티풀'할 수가 없다. 욱스발도 몸이 급격히 쇠락하면서 곧 죽을 운명이고, 아이들의 엄마 역시 심각한 조울증으로 자기 자식들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부모가 둘 다 이런 지경인데 욱스발의 딸과 아들은 오죽할까.. 아마 이 아이들의 성장기도 무척 위태로울 것이다. 또 중국인 노동자들은 어떤가?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노동력을 착취 당하고, 누구의 책임이든 간에 파리목숨처럼 생과 사를 참혹하게 오간다. 자기 나라에 일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아프리카 이주민들도 마찬가지다. 길거리에서 짝퉁을 팔기 위해 맨날 스페인 경찰들에게 쫓기고 여차하면 철창 신세가 된다. 푼돈이라도 모아 이 나라에 정착하길 원하지만 사회의 최하층민을 아예 벗어날 수 없고, 이런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그저 추방 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모두 다 하나같이 아름다울 수가 없는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욱스발의 딸은 공부를 계속 하고 아빠에게 영어 '뷰티풀'의 철자를 묻는다. 많이 배우지 못한 인력브로커 욱스발은 그냥 '소리 나는 대로' biutiful 이라고 가르쳐 준다. '비우티풀'.. 착한 딸은 아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뷰티풀이 아닌 비우티풀을 배운다.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 이들의 삶은 전혀 뷰티풀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뷰티풀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은 나름 비우티풀하게 살아간다. 욱스발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 애쓰고, 아이들은 그래도 순수하다. 그리고 참 중요한 역할,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목숨 걸고 이주해와서 집도 절도 없는 아기 엄마 '이헤'는 백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흑인으로서의 존엄성과 인간성을 끝내 잃지 않는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말하는 비우티풀

 

영화 <비우티풀>의 분위기는 어둡다. 말기암의 주인공이 죽어가는 이야기이고, 그를 둘러싼 세계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욱스발이 생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는 멕시코에서 죽었고, 욱스발 주변의 이방인들도 머나먼 타국인 스페인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있는 죽음의 기운, 아버지의 존재로 드러나는 주인공의 불우한 과거, 주변 이방인들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는 욱스발의 현재,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고난이 닥치게 될 자식들의 미래.. 마치 멕시코의 암울한 역사처럼, 이 영화는 주인공의 과거('이방인 아닌 이방인'이었던 아버지와 욱스발)와 현재(착취 체계 속의 욱스발과 이주 노동자들)를 암울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이 작품을 '비우티풀'한 영화로 만들었다. 바로 욱스발의 딸과 아들을 흑인 엄마 '이헤'와 연결시켜줌으로써 이들의 미래를 비극으로부터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어린 아이들과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여성만으로 쉽게 희극이 될 순 없겠지만, 암울함 속에서도 이들이 어떻게 인간적으로 결합하는지를 짧지만 아주 인상적으로 이 멕시코 출신 감독은 보여주고 있다. 물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헤와 아이들의 삶이 결코 뷰티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건 감독도 알고, 관객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심어 놓은 몇몇 강렬한 장면들을 보며 (마치 멕시코의 미래를 낙관하듯) 우리는 이들이 뷰티풀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비우티풀하게 살아갈 수는 있을 거라는 일종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우티풀>을 보며 우리가 감동하는 이유이고, 감독이 말하는 '비우티풀'의 진정한 의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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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ART

Posted by 아서정 Arthur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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