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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α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 어른용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

시대나 사회의 왜곡과 언제나 함께 살아가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고뇌.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바람이 분다>를 보기 전에는, 그가 은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미래소년 코난(1978)>, <루팡3세-칼리오스트로의 성(1979)>,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마녀 배달부 키키(1989)>, <붉은 돼지(1992)>, <모노노케 히메(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벼랑 위의 포뇨(2007)> 그리고 <바람이 분다(2013)>.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출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 목록이다. 거의 대부분 그가 각본도 썼고, 본인이 설립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들었다. '미래소년 코난'부터 '벼랑 위의 포뇨'까지 그 어느 작품 하나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 무리가 없고, 남녀노소 모두가 즐겁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짐작컨대, 무려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의 작품들을 모두 모아놓고 봤을 때 이 정도로 '믿을 만한'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있는 감독은 전세계를 통틀어서도 정말 흔치 않을 것이다. 이게 바로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추천하고, 또 계속 기대하는 이유다.

 

물론, 누구에게든지 영화를 추천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모두가 말하듯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각 개인의 취향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영화를 추천할 수는 있다. 이 영화를 추천 받은 사람이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그 작품의 객관적인 탁월함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라도 '제임스 카메론'을 좋아하고 '미카엘 하네케'를 싫어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이 두 사람이 탁월한 감독이라는 것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개인의 취향과는 거의 상관없이, 영화라는 매체에 진정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뛰어난 작품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은 모두가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탁월한 애니메이터이고 뛰어난 예술가다.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지브리의 어른용 애니메이션

 

사실, 한국에서 '만화영화'라고 불리는 애니메이션에 또다시 '아동용' 또는 '어른용'('성인용'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겠지만, 이건 소위 말하는 '19금'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에 그냥 어른용이라고 부르겠다)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참 조심스럽다. 안 그래도 만화영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또 작품 자체로 보면 별 의미도 없는 '아동-어른'으로 나눈다는 건, 괜한 오해를 쓸데없이 더하는 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작품만 보면 그저 하나의 애니메이션일 뿐이고, 단지 관람등급이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서술상의 필요와 간결한 이해를 위해 여기서는 '어른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꽤 도움이 될 듯싶다. 앞서도 말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이제까지 만든 애니메이션들은 모두 어린이들과 함께 보기에 좋은 작품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웃집 토토로>가 대표적이고, 그외 작품들도 아이와 손잡고 언제나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주인공도 대부분 소년이나 소녀였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나 순수한 호기심, 아름다운 그림과 환상적인 세계, 밝고 사랑스런 등장인물 등이 화면을 주로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는 좀 다르다.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소재'에 대해서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전체적인 표현방식 자체가 '어른용'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쉽고 단순한 '아동용'의 문법에서 벗어난 부분도 많고, (마치 예술적인 실사영화처럼) 대사 없이 장면으로만 설명하는 내용도 있으며 길지 않은 대사들도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이와 같이 보면 절대 안된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전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처럼 어린이들이 그다지 즐거워할 만한 작품은 아닌 것이다.

[찬찬히 들여다 보면 그다지 밝은 이야기도 아니고(오히려 우울하다), 상당히 철학적인 함의가 깔려 있기도 하다] 

 

우리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를 자녀와 함께 즐겁게 볼 수는 있지만,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을 그렇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측면에서 지금까지 나온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이 '아바타' 쪽에 속한다면, <바람이 분다>는 가상의 공간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굳이 딱 둘로 나눠봤을 때에 상대적으로 '히든' 쪽에 가깝다. 아바타와 히든은 둘 다 정말 뛰어난 영화이지만, 작품의 성격 자체가 많이 다른 것이다. 아바타를 보는 시각으로 히든을 봐서야 되겠는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일반 상업영화의 틀로 판단하면 감상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바람이 분다'도 역시 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요즘은 작품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평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인데,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룰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르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는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은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을 보지도 않고 그런 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도 그 누구든지 직접 보고서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천안함 프로젝트> 같은 영화를 보지도 않고 무조건 욕부터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불편한 소재, 그러나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았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30년대 일본의 항공모함 이착륙 전투기(일명 '제로센')를 설계한 '호리코시 지로'이다(이 함상전투기 제로센은 카미가제 자살 특공대 기체로도 사용됐단다). 기본적으로 실존인물이 나오는 시대극이기 때문에, 1923년의 '관동대지진'을 비롯해서 사실적인 배경이 다수 등장한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자연스러움을 살리고자 호리코시 지로의 목소리에 성우나 배우 대신 <에반게리온>의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 목소리, 이것만으로도 이 작품에 주목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자, 그러면 여기서부터 직접적인 얘기를 좀 해보자. <바람이 분다>가 지금 한국에서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이 애니메이션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얘기가 '일본 군국주의 또는 전쟁 미화'와 '역사 왜곡'인 것 같다. 아무리 미카엘 하네케나 김기덕의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이 작품을 본다 한들 일제를 미화하거나 역사를 왜곡하려는 모습이 담겨있다면, 그것 자체가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제까지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떤 훌륭한 작품을 내놓았든, 일제 미화나 역사 왜곡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건 예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 작품을 실제로 보면 그런 게 없다. <바람이 분다>는 꿈에 관한 이야기이고 러브 스토리일 뿐, 억지로 미화하거나 일부러 왜곡하려는 대상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미화'라는 것은 사실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것처럼 꾸미거나 실제 이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다는 말인데, 이 애니메이션에서 아름답게 보여주는 건 '사랑'과 '꿈'이지 '전쟁'이나 '제국주의'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제국주의는 파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심지어 주인공과 주요인물들 직접 대사로 몇 번이나 '파멸'이라는 단어를 되뇌이기까지 한다), 전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리만치 거의 다루지 않는다. 혹여 전쟁의 참상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은 것 자체를 비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 빌미로 '미화' 운운하는 건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물론 호리코시 지로의 '꿈'이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비행기가 곧장 전쟁의 흉기로 활용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자신의 꿈에만 매달리는 건, 그 역사를 이미 다 알고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 불편할 수도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게 자기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적극적인 저항이 없이 무조건 자신의 꿈만 맹목적으로 좇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일견 역사적 무지에 대한 변명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은, 단순히 주인공이 제로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도를 눈으로 볼 수가 없지만, 영화 속에서는 창작자를 통해 등장인물의 의도까지도 관객은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럼 한 번 물어보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작품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숫제 지루하리만치 긴 시간을 들여 우리에게 반복해서 설명하는 호리코시 지로의 원래 '의도'가 과연 전투기를 만드는 것이었나? 전혀 아니다. 그는 그저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멋지게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주인공은 살생무기를 만들게 됐다. 바로 이 지점에 미야자키 하야오 은퇴작의 핵심적인 고뇌가 담겨 있다.

 

"내가 열심히 살아왔다고 해서 무조건 면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저는 '이웃집 토토로'를 어린이들이 밖에서 뛰어 놀길 바라는 바람으로 만들었지만 결국엔 아이들이 집안에서 TV를 보게 됐다. 간단치가 않다. 열심히 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 않나."

- 2013년 8월 30일 스타뉴스의 미야자키 하야오 인터뷰 중에서

 

세상살이가 그렇게 간단하면 얼마나 속 편할까? 하지만 <바람이 분다> 속 호리코시 지로의 삶처럼, 무조건 열심히 산다고 꼭 결과가 좋진 않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도 딱히 해피엔딩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꿈도 그렇고, 종말을 각오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다만 주인공이 되뇌이듯이, 왜곡된 꿈과 사랑은 일본 제국주의처럼 결국 '파멸'로 이어질 것이란 걸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 후반부에 계속 암시한다(이런 식의 설정은 수많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다). 애초부터 이 감독은 일제 미화나 역사 왜곡의 의도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짓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고, 언감생심 '피해자 코스프레'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며(등장인물들이나 무대가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진지한 어른들을 위해 시종일관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시대를 사는 것은 그 시대·사회의 왜곡과 함께 살고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은 일제 36년에서 독립한 뒤에도 '친일'을 청산하지 못했고, 오랜 군사독재의 잔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친일과 독재에 의한 근본적인 왜곡이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대로, 한국에서 2013년을 사는 것은 이 시대·사회의 '친일 독재' 왜곡과 함께 살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서 살면서, 친일에 의한 왜곡과 독재에 의한 왜곡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단언컨대, 아무도 없다. 아예 이 사회와 인연을 끊고 외국으로 이민가서 철저하게 그 나라 국민으로 살지 않는 한,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를 일단 비난하고 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한다.

 

누군가 말했듯이, 이것 역시 일종의 '비정상국가의 비애'인 셈이다. 그런데 사실, 일본도 비정상국가인 건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최근에 미야자키 하야오도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우경화하는 아베 내각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을까? 한국인이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것과, 일본인이 비판하는 건 다르다. 한국의 어떤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베에게 그랬던 것만큼 박근혜 정권을 비판했다고 한 번 상상해 보라. 아마 십중팔구 앞으로 4년 6개월 동안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목소리를 냈다.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바람이 분다> 같은 작품을 내놓고서도 말이다("제국주의는 파멸할 수밖에 없다"). 이건 웬만한 신념이 아니고서는 정말 힘든 일이다.

[요즘 한국과 일본에서 똑같이 역사 왜곡 교과서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만 봐도 뭔가 양국이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근본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이 꼭 정상이라는 건 아니지만, <바람이 분다>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군국주의 또는 전쟁 미화'와 '역사 왜곡'의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한국이나 일본보다는 더 낫다.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히 처단했고, 독일은 어쨌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독일의 어떤 유명한 감독이 '바람이 분다'와 비슷한 영화를 찍었어도 프랑스 사람들이 이토록 분개했을까? 솔직히, 별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 자체도 일본 사회의 왜곡과 시대의 왜곡을 함께 살고 있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나왔겠지만, 한국의 관객들 역시 상처가 있기 때문에 '바람이 분다'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나오는 '빨간약'과 '카스테라'를 보고 참 복잡미묘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 사회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천안함 프로젝트> 같은 영화를 불편해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바람이 분다'가 친일에 의한 왜곡 때문이라면, '천안함 프로젝트'는 독재에 의한 왜곡 때문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국에서 2013년을 사는 것은 이 시대·사회의 '친일 독재' 왜곡과 함께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압박감 속에서도 아베 내각에 대해 쓴소리를 한 것처럼, <바람이 분다>를 제대로 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 감독과 작품의 객관적인 탁월함을 찾는 걸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면, 또 이 시대와 사회의 '친일 독재' 왜곡에 저항하는 걸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괴뢰국가인 만주국과 지금의 자민당을 만든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 아베 신조가 정권을 잡고 있으며, 요즘 계속해서 극우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일본을 보면, 그곳의 2013년 시대·사회의 왜곡은 앞으로도 더 나아지기 어렵겠다는 예감이 든다. 게다가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일본은 국운 자체가 기울었으니, 전성기가 지났고 나이도 많은 미야자키 하야오로서도 직접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까지 했지만 아무래도 도리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을 듯싶다. 그렇다면 <바람이 분다>로 예전과는 달리 논쟁의 한가운데 섰고 아베 내각에 직격탄을 날린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전처럼 충실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게(훌륭한 필모그래피를 계속 채우는 게)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바람이 분다>를 보고 난 후에는, 그가 이쯤에서 은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