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출신 감독이 일본 오타쿠 문화를 차용해 미국 헐리우드에서 만든 SF 판타지.

 

영화 <퍼시픽 림(Pacific Rim)>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감독이 바로 '길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1964~ )'라는 것이었다. 퍼시픽 림의 두 가지 키워드는 당연히 '로봇'과 '괴수'인데, 만약 미국 감독이 만들었다면 과연 로봇 영화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뛰어넘어 뭔가 새로운 걸 보여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만약 일본 감독이 만들었다면, 괴수 영화 <고질라> 시리즈와 같은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멕시코 출신 감독이 만든 Pacific Rim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Transformers와도 달랐고, 일본 특촬물 Godzilla와도 분명히 달랐다.

 

길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각적인(visual) 측면과 정신적인(spiritual) 측면을 함께 생각해 봐야 될 듯싶다. 그래서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얘기도 좀 필요할 것 같고, 퍼시픽 림이 여타 일본 특촬물이나 헐리우드 영웅물과 어떻게 다른지도 좀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약간 복잡할 수도 있겠는데, 이 영화의 차별성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간단하게라도 조금씩 짚어보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퍼시픽 림은 기본적으로 여름 시즌의 대규모 흥행을 겨냥한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에, 그냥 별 생각 없이 편하게 화면만 봐도 눈요깃거리로서 충분히 재밌다. 다만 Pacific Rim을 극장에서 즐겁게 보고 그냥 끝내도 되는데 굳이 영화에 대해 '긴 글'을 쓴다면, 그래도 이 정도는 얘기를 해야 진짜 '리뷰'를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길예르모 델 토로의 비주얼, '일본 특촬물'의 어설픔과 다른 점

 

길예르모 델 토로의 전작들을 보면, 그는 흔한 미국 상업영화 감독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멕시코에서 태어났고, 첫 장편영화 <크로노스(Cronos, 1993)>도 멕시코에서 만들었다. 길예르모 델 토로 영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단어 두 개가 바로 '판타지'와 '공포'일 텐데, 이미 '크로노스' 때부터 시작해서 <악마의 등뼈(El espinazo del diablo, 2001)>를 거쳐, 드디어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El laberinto del fauno, 2006)>에 이르러서는 둘 사이에 거의 완벽한 균형을 이뤄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아마도 한국에서 이 세 편의 영화를 다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듯한데, 길예르모 델 토로라는 아티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 세 영화는 무조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들 알겠지만, '공포'와 '판타지' 영화에서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비주얼'이다. 비교적 많은 이들이 봤을 '판의 미로'의 놀라운 비주얼을 기억하는가? 이건 단순히 '리얼리티'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영화속 세계에 관객들이 진정으로 몰입하여 긴장감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느냐, 또 그로테스크한 전체 분위기와 스토리상의 충격적 반전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감독의 미장센이 전달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이건 돈만 많이 들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전문가 몇 명 데려온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심형래를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오지 않나). 감독 자체가 '비주얼리스트'로서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자기 영화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화적인 배경도 꽤 중요한 듯하다. 남미적 오컬트(탐험 영화에 나올 법한, 마치 남미 고대문명의 특수장치 같은 '크로노스'의 신비한 기계)와 중세 암흑기 느낌이 나는(악마의 등뼈와 판의 미로 배경은 스페인이다) 이 세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길예르모 델 토로가 멕시코에서 태어나지 않았던들(멕시코는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판타지와 공포가 이토록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미장센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팀 버튼'처럼 판타지에 특출난 감독도 있고 <마스터즈 오브 호러>의 감독들처럼 공포에 재능을 가진 이들도 많지만, 길예르모 델 토로만큼 공포와 판타지를 동시에 잘 표현하는 감독은 정말 흔치 않은 것 같다.

 

이런 탁월한 비주얼리스트가 일본 특촬물의 특기인 괴수와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를 연출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특촬물을 그리 많이 보진 못했지만, 이런 영화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비주얼적인 어설픔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단지 특수효과의 수준하고는 좀 다른 얘기다. 그런대로 비주얼적인 구색을 어느 정도 맞춘다고 하더라도, 로봇이나 괴수들의 오타쿠적 특색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이걸 잘 알지 못하는 일반 관객이 보기에는 그 비주얼이 아예 우스꽝스럽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심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일본 감독들이 아무리 이것 저것 만들어 봐야, 결국에는 '울트라맨'과 '고질라' 아니면 '건담'과 '마크로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전자는 지나치게 막무가내여서 어이가 없고, 후자는 지나치게 전문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둘 다 일반 관객이 수긍하기 힘든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퍼시픽 림>에서 길예르모 델 토로의 괴수와 로봇은 달랐다. 그는 이미 기본적으로 (판타지와 공포가 잘 어우러진 세 편의 영화를 통해) 비주얼을 중심으로 긴장을 조성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블레이드>나 <헬보이>를 통해 상업적으로 액션이나 SF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잘 공부한 상태였다(헐리우드 거대자본 이용법은 덤). 사실 '크로노스'에도 소규모이긴 하지만 메카닉적인 요소가 등장했고 '판의 미로'나 '블레이드'에는 괴생물체 표현에 상당한 공을 들였는데, 특히 '헬보이'는 상업영화에서 메카닉과 괴생물체를 다루는 방법론의 측면에서 길예르모 델 토로에게 무척 많은 연습이 된 것 같다(퍼시픽 림의 몇몇 장면에 헬보이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퍼시픽 림에 나오는 로봇과 괴수들은 고질라와 건담 사이에서 '중용'을 잘 지킨 듯하고,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헐리우드의 특수효과는 여기에 날개를 달아줬다. 그래서 일본 특촬물을 좋아하는 오타쿠가 아니더라도, 퍼시픽 림은 충분히 만족스럽게 볼 수 있는 영화다.

 

길예르모 델 토로의 스피리추얼, '헐리우드 영웅물'의 유치함과 다른 점

 

사실 헐리우드 영웅물은 유치한 면이 많다. 보통 캐릭터들 자체는 굉장히 개인주의적인데 어쩌다가 '미국이 세계를 구한다'는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인물로 돌변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도 때도 없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는가 하면, 계속 집단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들로 갈등을 만들어나가다가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상적인 해법을 제시하면서 끝낸다. 물론 <다크나이트> 시리즈처럼 약간 다른 영화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이런 식이고, 또 물량공세를 펼치며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보는 영화를 지향하는 일반적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이런 유치함이 그다지 큰 결격사유가 되지 않는다. 그냥 <트랜스포머>나 그래픽노블 영웅물 시리즈들처럼 최신 특수효과와 인기 배우 등으로 밀고 나가면 되고, 소위 말하는 '서사'도 액션과 볼거리로 대충 뭉개고 갈 수 있다. 어차피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러 오는 관객들도 별로 다른 걸 원하지 않는다(퍼시픽 림에도 어느 정도는 적용된다).

 

그런데, 괴수 영화나 로봇 영화가 되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여기서는 로봇이나 괴수가 사실상 주연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영화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조연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괴수나 로봇 자체가 어떤 '로망'을 대변해 줘야 한다. '(미국) 영웅이 세계를 구한다'라고 말하는 영화에서는 결국 (인간) 영웅에 대한 포장만 잘 하면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끌어낼 수 있지만, 로봇물이나 괴수물에서는 그것만 가지고서는 한참 모자란 것이다. <퍼시픽 림>을 보면 알겠지만, 여기 나오는 거대 로봇(예거)은 단순히 수퍼맨 망토 같은 게 아니다. 인간과 혼연일체가 되어 거대 괴수(카이주)에 맞서 강력한 주먹을 날리는 존재다.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싱크로율과 유사한 '드리프트' 시스템을 통해 인간과 한몸이 되고, 인간이 움직이는대로 똑같이 움직인다. 그리고 각 예거들은 다 특색이 있고, 나름의 역사를 가진다.

 

 

이런 기본틀은 다 일본 로봇물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는데,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엔딩 크레딧의 special thanks에 '마징가'를 만든 일본 애니메이터 '나가이 고(Nagai Go, 1945~ )'나 '건담'을 만든 토미노 요시유키(Tomino Yoshiyuki, 1941~ ) 등등을 명시할 정도로 이 오타쿠 문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또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 영화에 임하는 감독의 태도 자체가 오타쿠의 정신, 오타쿠의 로망으로 무장하고 있는 셈이다(이런 로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퍼시픽 림을 보면서 가슴 벅찬 일종의 감동도 느낄 수 있다). 만약 다른 미국 감독이 퍼시픽 림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십중팔구는 미국 영웅물처럼 로봇 조종사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것이다(일단 전반부에 가족 얘기 좀 하고, 애인과의 갈등을 그 다음에 곁들이며, 마지막에는 미국이 세계를 구한다).

 

하지만 길예르모 델 토로의 로봇물은 달랐다. 인간들의 사연은 최소한의 핵심만 짚고 빨리 넘어가고, 예거 자체의 활약상(물론 안에 인간이 타고 있다)을 화끈한 전투장면으로 원없이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서 일반적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유치한 장치들을 많이 뺐고, 그보다는 시종일관 비장한 캐릭터들과 함께 관객이 예거를 통해 가질 법한 로망을 수시로 자극하는 연출을 한다. 주연 배우들에겐 안 된 얘기지만 특별히 전체 영화를 장악하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간 영웅은 별로 없으며,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로망을 대변하는 존재는 남자주인공이나 여자주인공이 아니라 바로 예거 그 자체다(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예거의 디자인에 무척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 지점이 바로 영화 <트랜스포머>와 <퍼시픽 림>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을 듯싶고, 다른 헐리우드 영웅물 감독과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달랐던 점일 것이다.

 

 

뛰어난 각본가, 길예르모 델 토로의 차기 <퍼시픽 림>에 대한 기대

 

<퍼시픽 림>만 본 사람들은 '뛰어난 각본가'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길예르모 델 토로가 각본과 연출을 함께한 작품(크로노스, 악마의 등뼈, 판의 미로, 헬보이 등)을 일부러 찾아서 보고, 그가 <반지의 제왕> 시리즈 피터 잭슨 감독의 차기작인 <호빗> 시리즈의 각본도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퍼시픽 림의 각본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좋은 각본이라는 건 단순히 서사가 짜임새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업영화에서는 이와 함께 영화의 타겟이나 지향점에도 적합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퍼시픽 림의 스토리도 그다지 엉망은 아니었다. 보여줄 게 그만큼 많았고, 로봇-괴수 영화의 미덕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디지털'로는 안 봐서 모르겠지만, 3D 이상 IMAX나 4D에서는 충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마디로, 비주얼적으로는 그 어떤 영화에도 안 밀리고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다.

[굳이 상대평가를 하자면 '트랜스포머 1편'과  '퍼시픽 림'이 비슷한 수준이고, 나머지 '트랜스포머' 시리즈 영화들보다는 퍼시픽 림이 훨씬 나았다]

 

길예르모 델 토로는 원래 좀 삐딱하고(헬보이와 다른 영웅물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자기만의 색깔이 분명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트랜스포머'의 아류가 쏟아지고 있다"는 마이클 베이 감독의 말에, 이 감독은 "퍼시픽 림은 내 창작물이며 세계다. 예쁘고 반짝거리는 자동차 광고 같은 영화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했단다). 퍼시픽 림도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이긴 하지만, 길예르모 델 토로의 스타일에 비춰보면 지나치게 건더기(?)가 없는 영화다. 그냥 거의 걸리는 게 없이 상대적으로 무척 부드럽게 넘어가고, 전작들과 비교해서 감독 특유의 삐딱함이나 색깔이 너무 희박한 편이다(이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서 차기 <퍼시픽 림>은 감독 자신의 스타일이 더 많이 배어나는 작품이었으면 좋겠고, 일단 이번 영화에서 '예거'와 '카이주'를 처음 소개하는 데는 성공했으니 차기작에서는 조금 더 깊은 얘기를 보여줬으면 한다. 물론 퍼시픽 림의 최종 흥행 성적에 따라 많은 부분이 달라지겠지만, 프리 프러덕션은 이미 시작됐다는 소식도 들리니 한 번 기대를 해봐도 좋을 성싶다. 미국 감독들의 천편일률적인 헐리우드 영웅물은 이제 좀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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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ART

Posted by 아서정 Arthur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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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장지기 2013.07.15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하루 이어가시기를..
    인사만 드리고 갑니다^^

  2. sephia 2013.07.15 14: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감독이 헬보이의 그 감독이었군요. 쿨럭.

  3. 늙은 호텔리어 몽돌 2013.07.15 15: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왠만한 영화평론보다 훌륭하신 듯 합니다.
    일단 좀 봐야겠군요.
    말씀을 듣고 보니, 대강 보고 넘겼던 판의 미로도 다시 보고 싶네요.

  4. Char 2013.07.17 1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시픽 림 보고싶은데 Arthur님 리뷰로 더욱 궁금합니다 ㅎㅎㅎ
    저도 판의 미로 워낙 감명깊게 봐서 즐겁게 읽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