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사랑의 뜻이 바뀌었고, 프랑스에서는 결혼의 개념이 바뀐다.

 

다들 알고 있듯이, 한 나라의 역사교과서는 단순 기록물이나 학교 교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 의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 중에 하나가 역사교과서이며 또 그 사악한 계략의 첫 번째 타겟 역시 역사교과서인 동시에(우선 역사교과서를 바꿔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양국 정부의 역사인식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도 당연히 역사교과서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그 나라의 역사교과서가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보면, 해당 국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책은 참 중요한데, 근본적인 중요성으로 보면 사전 역시 이와 비슷하다(국어辭典이나 백과事典이나 둘 다 마찬가지다). 단순 기록물이나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사전을 보고 어떤 어휘의 의미를 익히고, 특정 사물이나 사항에 대해 개념화한다. 이전에는 그저 존재했을 뿐 사회적으로 정체불명이었고 몰이해 또는 무의미의 단계에 있었던 것이, 사전에 정의됨으로써 마침내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사전이 개별 어휘·사물·사항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지를 보면, 그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는 셈이다.

 

그래서 사전의 내용은 토씨 하나 바꾸는 데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고, 본문에 사용할 단어를 선택할 때에도 정말 주의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그 사회의 좋지 못한 사회적 편견이 사전의 표현 속에 드러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회구성원들이 어떤 사물이나 특정 어휘 등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 사회의 다수와는 뭔가 다른 소수, 인습에 반하는 행위, 사회일반에게 익숙지 않은 것들과 관련된 내용에서는 더욱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 누구의 당연한 권리도 최대한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표준국어대사전 검색 결과]

 

이미 대한민국에서도 '사랑'의 뜻이 바뀌었다

 

예전에 우리 나라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사랑'의 대상을 '이성'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을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의에 따르면, 동성애자 같은 성적 소수자들의 사랑할 권리는 제대로 존중 받지 못하는 셈이 된다. 분명히 성적 소수자들도 사랑을 나누는데, 사전에는 '이성'이라는 단어로 그 의미를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동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는 사랑이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것도 물론 사랑이다. 그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가 우리의 국어사전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일 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이랬던 '사랑'의 뜻이, 마침내 작년 11월에 바뀌었다. 대한민국의 국립국어원이 사랑의 뜻을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개정한 것이다. 결정적인 차이가 느껴지는가? '이성'이라고 표현했던 부분을 '어떤 상대'로 바꿨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이성뿐만 아니라 동성도 포함된다. 성적 소수자들의 사랑도 드디어 사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사랑뿐만 아니라 '연인', '연애', '애인', '애정'의 뜻풀이도 모두 개정됐다. '남녀' 또는 '이성'으로 표현되었던 부분이 '두 사람' 또는 '서로' 등으로 수정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성애자이긴 하지만, 무척 고무적이고 반가운 변화였다.

[연관된 단어 5개가 동시에 개정된 것이므로, 이 개정을 '가족애'나 '인류애'의 측면에서 한정하여 해석하기보다는, '이성애'나 '동성애'와 관련지어 전체적으로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하는 게 적절하다]

 

[2012년 12월 6일 동아일보 보도]

 

이건 단순히 본문의 단어 하나가 바뀐 게 아니라,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마치 법전처럼 굉장히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국어사전의 내용 자체가 변화된 것이고, 우리가 사랑·연인·연애·애인·애정을 생각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인식하기 쉬운 '이성 관계'에 대한 관념을 아예 근본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제 사랑은 이성애자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동성애자들도 이성애자들이 하듯이 똑같이 사랑을 하고, 연인이 되며, 연애를 하고, 애인 관계가 되며, 애정을 가진다. 물론 동성간의 사랑을 얘기하면서 유별나게 '동성'을 강조하는 현 세태가 한순간에 바뀌진 않겠지만, 어쨌든 이성이든 동성이든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은 모두 동일한 '사랑'이 되었다.

 

앞으로 결혼의 사전적 정의도 바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나라에서도 사랑의 뜻은 벌써 변화됐다. 이제 남은 건 바로 '결혼'의 개념이다. 여기에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듯한데, 사랑·연인·연애·애인·애정처럼 추상적인 단어들의 뜻을 개정하는 것과 여러모로 실질적인 단어인 결혼의 뜻을 바꾸는 것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결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법률적·행정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결혼은 이성간에만 성립하고, 동성간의 결혼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도 동성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할지 여부가 엄청난 사회적 논란을 야기하고 있고, 흔히 말하는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격돌하며 선거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에서 아주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게 보통이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표준국어대사전 검색 결과]

 

지금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결혼'을 검색하면 위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 사랑과 연인의 뜻풀이에서 '남녀' 또는 '이성'으로 표현되었던 부분을 '두 사람' 또는 '서로' 등으로 수정했던 바로 그 국립국어원도, '결혼'에 대해서만큼은 아직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는 걸 결혼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으며, 아마도 여기에 등장하는 '남녀'라는 표현이 바뀌는 데에는 연애의 뜻풀이에서 '남녀'라는 단어가 빠지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어려운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근시일 내에는 절대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감히 어느 누가 '결혼'의 개념에서 '남녀'를 빼자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대한민국 정치인도 말하기 힘든 얘기고, 실제로도 이런 논의는 우리 사회에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밀접하게 관련된 단어 5개의 뜻을 개정한 국립국어원은, 어쨌든 '결혼'의 사전적 정의 개정에 대한 검토를 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만약에 결혼의 사전적 정의가 공식적으로 개정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올 대사건이 될 공산이 크다. 일단 기존의 몇몇 재판에서 법률적 판단에 대한 논쟁이 발생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동성 결혼 인정'이라는 거대한 이슈에서 현행법 개정이라는 실질적 액션이 표면화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일반적으로 법전이나 사전은 둘 다 굉장히 보수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는 편이므로, 법률 개정 움직임이 먼저 일어날지 아니면 사전 개정 요구가 먼저 시작될지는 아직 그 누구도 모른다. 다만, 한국보다 먼저 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는 다른 나라를 참고할 수는 있겠다.

 

요즘 프랑스가 우리보다 한발짝 앞서서 '결혼'의 사전적, 법률적 개념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 최대의 사전 전문 출판사인 라루스가 내년에 출간될 사전에 결혼의 개념을 바꾸겠다는 입장을 최근 밝혔다고 한다. 현재 프랑스의 동성결혼 허용법안은 지난 2월 하원 통과에 이어 며칠 전인 이번 달 12일에는 상원에서도 통과돼, 마침내 올해 6월부터 시행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상황이다. 라루스 출판사는 원래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는 행위"로 돼있는 결혼의 정의를 "남녀 또는 동성의 두 사람이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는 행위"로 개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는데, 만일 이렇게 되면 프랑스는 세계에서 12번째로 동성결혼 합법화 국가가 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사전을 통해서도 결혼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셈이 된다. 여전히 이 법안에 대한 반대는 강하지만, 아무튼 결혼의 사전적 정의를 바꾸는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계획이 공개되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과연 우리 나라는 언제쯤 이와 같은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까? 사랑·연인·연애·애인·애정의 뜻은 벌써 다 바뀌었다. 이제 결혼의 개념만 바뀌면, (적어도 사전적으로는) 동성애자들 역시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된다. 동성끼리도 자연스럽게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부부관계'를 맺는 것이다! 사실 법률적으로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문제와는 엄밀히 말하면 별개지만, 프랑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전 개정'과 '법률 개정' 두 가지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거의 동시에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럼 끝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동성 결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의 첫머리에 서야 할까, 아니면 남들이 다 지나간 다음 끄트머리에서 따라가야 할까? 이거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불과 5개 월 전에 국어사전에서 사랑의 뜻이 실제로 바뀌었듯이, 대한민국도 그리 머지않아 결혼의 사전적 정의에 대한 논쟁이 시작될 시점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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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서정 Arthur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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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ipp 2013.04.15 17: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굳어진 개념이나 인식을 변화시키는 일이 쉽지는 않겠죠..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또 인권의 나라라는 프랑스도
    동성결혼에 대한 반대여론이 꽤 거셉니다. 좀 의외의 반응이라 올랑드 정부도 놀라고 있을듯 ..
    어쨌거나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걸 주장하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