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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녀유혼, 1987년과 2011년의 유사점과 차이점

천녀유혼(倩女幽魂, A Chinese Ghost Story, 1987)

천녀유혼(倩女幽魂, A Chinese Fairy Tale, 2011) 비교.

 

천녀유혼을 처음으로 본 게 언제쯤이었을까? 포털사이트의 한국 개봉정보를 보니 198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개봉했다고 적혀 있는데, 언뜻 생각하기로 극장에서 천녀유혼을 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VHS로 봤을 텐데, 이것도 2편을 본 것과 헷갈릴 수 있으니 확실치 않다. [1편과 2편은 감독과 주연배우 2명이 같다] 물론 그 뒤로 종종 텔레비전에서 방영을 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보진 않았더라도 가끔 몇 장면을 보긴 했을 것이다. 그러니 비디오로 봤는지 텔레비전으로 봤는지(만약 텔레비전으로 봤다면 아마도 더빙판이었을 것이다)부터 시작해서 1편과 2편이 뒤죽박죽되어, 처음으로 천녀유혼을 본 게 언제인지는 도통 알 길이 없다.

 

이렇듯 작품 자체에 대한 건 꿈을 꾸는 것처럼 불확실하지만, 그에 반해 또렷이 남아 있는 몇 가지 기억들이 있다. 왕조현이라는 사람은 지극히 아름다웠다는 것 그래서 그후로 오랫동안 이상적인 여성상이었고, 장국영이라는 사람은 왠지 친근감이 들었다는 것 그래서 갑자기 그가 죽었을 때까지도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녀유혼 (倩女幽魂, A Chinese Ghost Story, 1987)
로맨스/멜로, 판타지 | 홍콩 | 93 분 | 감독: 정소동, 출연: 왕조현, 장국영, 우마


어쩌면, 성장기에 천녀유혼을 인상 깊게 본 이들이라면 많은 사람이 이런 비슷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자는 장국영이고 남자는 왕조현이라는 것만 다를 뿐, 우리 추억의 한 귀퉁이를 천녀유혼의 왕조현과 장국영이 아련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마음 속의 왕조현은 사람을 홀리는 요괴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스러운 천사이고, 장국영은 어리바리한 서생이 아니라 착한 왕자님이다. 비록 한국 영화도 아니고 실생활과 가까운 소재도 아니며, 전혀 현실성 있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말이다.

 

모든 영화는 일종의 판타지라고 본다면, 천녀유혼만큼 이 표현에 잘 맞는 영화도 별로 없을 것이다. 몽환적인 이야기, 환상적인 배우들, 마치 꿈처럼 남아 있는 장면들. 음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변한 것처럼 영화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기에, 우리가 80~90년대로는 되돌아갈 수 없듯이 이런 영화는 다시는 없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런데 바로 그 영화가 리메이크되어 이번에 새로 개봉했다.

 

 

 천녀유혼 첫번째 리뷰: 천녀유혼(1987)이 아닌, 천녀유혼(2011) 자체만 본다면 [클릭]

 


2011년의 천녀유혼은 줄거리도 다르고, 감독도 다르고, 왕조현과 장국영도 출연하지 않는다. 24년의 긴 시간만큼이나 원작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제목의 영화인 만큼 유사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가장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는 것이 주요인물들의 이름이 같다는 것이고, 소재나 설정이 비슷하다는 것도 금방 눈에 띈다.

 

이와 같이 두 영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같은 점과 다른 점들이 몇 가지 보이는데, 이전 포스트에서 리메이크 작품 자체에 집중하며 리뷰를 했다면, 이번에는 과거의 천녀유혼과 현재의 천녀유혼이 어떻게 유사하고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나름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단, 어차피 오마주의 성격이 있는 리메이크이기에 세세한 장면 또는 대사가 비슷한 부분들이 꽤 있는데 그런 지엽적인 것들보다는 좀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러니까 예전에 천녀유혼(1987)을 본 사람들이나 이번에 천녀유혼(2011)을 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각각 어느 정도 상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방향으로 포스팅을 할 거라는 점은 미리 말해 둔다.

 

 

천녀유혼 (倩女幽魂, A Chinese Fairy Tale, 2011)
SF, 판타지, 로맨스/멜로 | 중국 | 98 분 | 감독: 엽위신, 출연: 고천락, 유역비, 여소군


먼저, 두 영화의 유사점을 찾아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영화 내적인 세계, 즉 배경이 비슷하다. 시간적으로 과거인 중국의 어느 마을, 요괴에 대한 실질적인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회를 기본 바탕으로 천녀유혼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요괴의 본거지가 되는 난약사라는 절(寺)도 동일하게 등장하고, 두 영화 다 민심이 흉흉한 상태의 마을이 공간적 배경이다. 원작 천녀유혼에서는 각종 흉악범들이 난무하고 관리들의 나태와 무능으로 인해 치안이 전적으로 부재한 상태의 마을인데 비해, 리메이크작에서는 그릇을 팔아 마을을 유지하는데 물이 완전히 말라 버려서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 곳이라는 점이 약간 다를 뿐, 주인공 남자가 섭소천을 만나는 계기가 되는 상황적 장치가 둘 다 비슷한 것이다.

두 번째로 '요괴와 인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라는 메인플롯이 같다. 어쩌면 이것은 리메이크이기에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는데, 굳이 여기서 언급하는 이유는 1987년작과 2011년작이 큰 줄기에서 보면 결국 같은 얘기라는 걸 말하기 위함이다. 아래에 서술하겠지만 이 두 작품은 시점이 많이 다르고 그래서 표현양식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이로 인해 장르적으로 접근방법이 좀 변화되긴 했다. 그렇지만 사실, 조금만 더 지켜보면 어느 정도의 변주가 있긴 해도 영화 두 편의 전체 흐름(인간 남자와 요괴 여자가 만나 첫눈에 반한다-서로 지켜주려 하지만 시련을 겪는다-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구성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쩌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긴 한데, 왜냐하면 표면적인 구성은 유사하지만 그 역할이나 인물들 간의 관계, 프로필이 결정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 작품이 캐릭터적으로 전체 구도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각 인물의 개별적인 틀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아름다운 요괴와 별 볼 일 없는 서생, 유능한 퇴마사, 여자주인공을 괴롭히는 우두머리 요괴 등 주요 등장인물 각각의 성분이 유사하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원작과 리메이크작 둘 다 직업이나 외적 처지가 동일한 인물들을 똑같이 선택해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원작의 두 주연인 영채신과 섭소천, 리메이크작의 세 주연인 연적하와 영채신 그리고 섭소천]

이제 두 영화의 차이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아마도 지금부터 서술하는 내용이 이 리뷰의 핵심이 될 것 같은데, 우선은 가장 큰 범주인 장르에 대한 얘기부터 해보자. 1987년의 천녀유혼과 2011년의 천녀유혼은 겉보기에는 같은 장르로 보인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장르적 비중이나 스타일이 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원작은 섭소천(왕조현)과 영채신(장국영)이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이 상당히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얼굴이 찡그려지기보다는 미소가 지어지는 장면이 훨씬 많다.

 

무슨 말인가 하면, 로맨틱하고 설레는 부분이 다수고 안타깝고 긴장되는 부분이 소수라는 것이다. 게다가 원작에서는 중간중간에 코믹적인 요소들이 꽤 많이 배치되어 있으며, 마치 B급 호러영화처럼 어설프고 어떻게 보면 장난스럽기까지 한 모습(초반에 등장하는 미라들이나 후반에 나오는 요괴의 혀를 보라)으로 특수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주인공들이 다급하고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도 심각하다기보단 즐거운 느낌이 강하다.

반면에 리메이크작은 사랑의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비중 있게(연적하는 이미 섭소천과 사랑의 아픔을 겪었으며, 섭소천은 곧바로 영채신과 사랑에 빠진다) 다루고 있으며, 그것의 비극성으로 인해 행복한 로맨스라기보단 슬픈 멜로의 감정이 더 크다. 또한 이 영화는 원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장치도 적고, 특수효과 역시 지극히 정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혀 장난스럽거나 어설프지 않고 진지하게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원작과 비교했을 때 제작비를 많이 쓴 것만큼이나 좀 무거운 톤의 리메이크가 되었고, 장르적으로도 유쾌한 로맨틱코미디보다는 심각한 멜로드라마에, 또 라이트한 판타지라기보다는 헤비한 판타지에 약간 더 가까운 작품이 되었다. 이런 결과는 사실 인물 관계의 변화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큰데, 곧바로 이어서 그 얘기를 해보겠다.

 

[원작의 연적하는 웃기는 조연, 리메이크작의 연적하는 멋있는 주연]

위의 사진은 원작의 연적하와 리메이크작의 연적하를 함께 붙여놓은 것이다. 따로 설명이 없어도 딱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둘은 정말 엄청나게 다른데, 바로 이것이 원작과 리메이크작의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원작에서의 연적하는 영채신을 도와주는 퇴마사 역할이고, 리메이크작의 연적하는 요괴를 사랑했다 포기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퇴마사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앞의 연적하는 코미디가 되지만, 뒤의 연적하는 코미디가 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니 원작의 '연적하'는 조연이면서 감초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리메이크작의 '연적하'는 주연이자 갈등의 가장 큰 축을 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웃기는 퇴마사가 쓰는 특수효과는 어설퍼도 되지만, 심각한 퇴마사가 쓰는 특수효과는 절대 그럴 수 없다. 결국 연적하라는 인물의 포지션이 두 영화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밝고 어두운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 위에 섭소천과 영채신, 연적하가 함께 있는 사진을 다시 보면, 더 확실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원작에서는 남녀 두 사람만 신경 쓰면 되기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리메이크작에서는 삼각관계에 신경을 써야 하고 연적하가 영채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어떻게 보면 앞의 영채신을 뒤에서는 둘로 쪼개 놓은 셈인데, 그러니 원작보다 훨씬 이야기 해야 할 분량이 늘어나며 여유가 없다. 그래서 거의 영화의 반이 사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자와는 달리, 후자는 두 번의 사랑을 보여줘야 하기에 과정은 없이 사랑의 결과 위주로 보여준다.

 

이런 경우에는 감정의 디테일을 살려서 사랑 표현에 밀도를 높이거나 아니면 주인공과 아주 가까운 주변인물을 통해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이들의 사랑을 드러내주는 방법이 있겠지만, 첫 번째 리뷰에서 말했듯이 2011년의 천녀유혼은 감정의 디테일이 부족하며 하설풍뢰나 하빙 같은 싸움꾼 캐릭터만 있을 뿐 사랑의 조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일종의 풍류(?)가 있는 원작에 비해, 리메이크작은 감정이입도 잘 안 되는 조급한 전개를 갖게 된 것이다.

 

[천사 왕조현과 인형 유역비]

마지막으로, 원작이나 리메이크작이나 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섭소천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할까 한다. 아무래도 '천녀유혼'하면 섭소천이고, 그녀의 파트너가 바로 남자주인공이다. 원작에서는 왕조현이었고 리메이크작에서는 유역비인데, 두 영화에서 섭소천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좀 의외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무려 24년 전 영화에서조차 왕조현은 상당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 반해, 21세기 최첨단 시대의 유역비는 답답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소극적이다.

왕조현은 그 유명한 목욕씬에서 벗은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국영을 구했으며, 우두머리 요괴의 공격에도 직접 몸을 던졌고, 후반부에는 직접 나서서 마왕과 결정적인 합을 겨루기까지 했다. 그런데 유역비는 영채신을 구하지도 못하고 주로 연적하나 하설풍뢰가 적과 싸우며, 목희 앞에서는 당하고만 있는다. 주인공으로서의 작품 주도력도 없고, 흥미를 주는 참신한 매력도 없으며, 시대에 맞는 재해석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원작의 섭소천이 살아있는 천사라면, 리메이크작의 섭소천은 박제된 인형인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인정하듯이 장국영의 존재감 또한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이 두 섭소천, 이 두 영화의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1987년의 천녀유혼과 2011년의 천녀유혼을 비교해 보았다. 원작이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천녀유혼이라면 리메이크작은 좀 비장한 천녀유혼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87년에는 왕조현과 장국영이라는 불세출의 매력을 가진 배우들을 통해 전설적인 작품으로 기록되었다면, 2011년에는 두 번에 걸친 리뷰에서 지적했듯이 안타깝지만 평범한 작품으로 남을 듯하다.

 

그것은 작품 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지금은 낭만과 여유가 없는 세상이어서 그렇고 기술이 인간을 포섭한 사회이기에 또 영화 끝에도 언급되었던 장국영이 없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리고 솔직히, 이번에 리뷰를 하면서 원작을 다시 봤지만 예전만큼 가슴이 뛰진 않았던 것 같다. 모르긴 해도 아마 대부분의 영화팬들이 그러리라. 이렇게 우리 관객들 자체도 변했다는 걸 부정하긴 힘들 테고, 1987년의 천녀유혼에 대한 추억도 영화 자체보다는 각자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