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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 α

영국 궁정화가가 된 대륙의 거장들, 한스 홀바인과 안토니 반 다이크

헨리 8세의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과 찰스 1세의 궁정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

 

헨리 8세와 찰스 1세.. 왕이라는 자리가 본래 그렇겠지만, 영국의 왕들 중에 이 두 사람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도 별로 없을 듯 싶다.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는 영국의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카톨릭 교회로부터 영국 교회를 독립시킨 것으로도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여섯 명의 왕비와 그에게 죽은 세 명의 토마스(여기엔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도 포함된다)로도 유명하다. 찰스 1세(Charles I, 1600년~1649)는 절대왕권과 의회와의 충돌 끝에 청교도 혁명을 야기했으며, 그 결과 왕권을 잃고 처형 당한 것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헨리 8세(재위 1509~1547)와 찰스 1세(재위 1625~1649)는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의 단골 소재가 되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들의 드라마틱한 삶은 온갖 이야기들로 재탄생할 듯하다. 또한 참 흥미로운 것이, 역사적인 영국의 왕인 헨리 8세와 찰스 1세는 둘 다 유럽대륙의 거장을 궁정화가로 받아들였는데, 이 두 화가는 서양미술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거장들이란 점이다. 그 중 한 사람은 독일 출신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지금의 벨기에 출신인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이다. 헨리 8세의 궁정화가였던 한스 홀바인과 찰스 1세의 궁정화가였던 안토니 반 다이크는 태어난 곳은 달랐지만, 둘 다 런던에서 생을 마감한다.

 

왼쪽: 한스 홀바인이 그린 마이어의 초상화, 1516년. 38.5 × 31 cm, 바젤 미술관
오른쪽: 한스 홀바인, [다름슈타트 마돈나(또는 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 1526년경. 제단화, 146.5 × 102 cm, 다름슈타트 미술관


먼저, 화가 집안(똑같은 이름의 아버지도 화가였다고 한다)에서 태어난 홀바인은 어려서부터 미술 교육을 받았으며, 얼마 안 가서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의 업적을 모두 다 섭렵한다. 서른 살 즈음에 이미,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바젤의 시장(Jakob Meyer) 이름으로 봉헌된 제단화를 그리며 화가로서 정상을 향한 길을 걸어가지만, 당시 종교개혁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 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기후와 건물의 양식이 이탈리아 귀족들이 그들의 궁전에 그리게 했던 그런 대규모의 프레스코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한스 홀바인도 역시 책의 삽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리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홀바인의 위대함과 행운을 같이 볼 수 있게 된다. 그가 그렸던 삽화 중에는 그 유명한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의 [우신예찬(Moriae encomium, Stultitiae Laus)]이 있었고, 이 인연 때문인지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도 그렸으며 그의 추천서를 받아서 첫 번째로 영국을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와 친구 사이였고, 우신예찬도 모어의 집에서 썼다는 말이 전한다]


"여기서는 예술이 죽어가고 있소." 종교개혁에 대해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에라스무스가 토마스 모어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에게 한스 홀바인을 추천한 글에서 한 말이다. 1526년부터 1528년까지 영국에 체류했던 홀바인. 하지만 그때까지도 궁정화가가 되지는 않았고, 다만 토마스 모어의 초상화와 그의 집안 사람들을 그린 작품들은 현재까지 전해진다.

 

왼쪽: 한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의 초상화, 1523년. 76 × 51 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오른쪽: 한스 홀바인이 그린 토마스 모어의 초상화, 1527년. 74 × 59 cm, 뉴욕 프릭컬렉션


1532년에 다시 영국을 방문한 홀바인은 이때부터 완전히 정착해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했고, 얼마 뒤에는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된다. 이 시기에 홀바인에게는 헨리 8세를 비롯한 왕실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주된 임무로 주어졌고, 그 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남겼다.

'그림 읽어주는 수녀' 웬디 베케트는 홀바인의 작품 [런던의 한 독일 상인 게오르크 기체]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홀바인은 마치 열쇠구멍을 통해 보이는 것 같은 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보라고 질문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 그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게 하는 안내문이 있다(그는 서른 네 살이다). 또한 런던의 스틸야드에서 온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를 통해 우리는 이 사람이 한자동맹에 소속된 상인이며, 무역에 필요한 도구들을 자신의 깔끔한 녹색 사무실에 정리해 두고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빛나는 새틴으로 된 소매를 봐서 그가 부유한 상인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의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아주 훌륭한 이국적 테이블 보가 깔려 있고, 베네치아산으로 보이는 꽃병도 놓여 있다. 꽃병에 꽂혀 있는 카네이션이 친밀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데, 카네이션은 원래 약혼을 상징하는 꽃이다. 결국 이 초상화는 그의 약혼녀였던 크리스틴 크루거에게 주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녀를 감동시키고 싶었을 것이다(벽에 붙어 있는 그의 좌우명, "그냥 생기는 즐거움은 없다"를 보라)... 사랑스럽게 매달려 있는 공 같은 것은 향갑으로, 그 안에는 향기로운 꽃잎들이 채워져 있어서 방안에 향기를 더해준다. 또한 금시계는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면 안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유럽 미술 산책]에서 발췌)

 

왼쪽: 한스 홀바인, [런던의 한 독일상인 게오르크 기체], 1532년. 96 × 86 cm, 베를린 국립회화관
오른쪽: 한스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의 초상화, 1536년. 28 × 18 cm, 마드리드 티센미술관


한스 홀바인은 이렇게 초상화 하나만으로도 한 인물의 이야기를 정말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거장이었고, 보석과 가구, 실내 장식뿐만 아니라 궁정의 패션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태어난 홀바인이 영국으로 떠나자 독일의 회화가 쇠퇴했듯이, 1543년 런던에 퍼진 흑사병으로 그가 죽자 영국의 회화도 마찬가지로 그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홀바인이 두 번째로 영국을 방문한 지 딱 100년 후인 1632년, 또 한 명의 거장이 영국 찰스 1세의 궁정화가가 된다. 열 아홉 살 때 이미 바로크 미술의 대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로부터 '내 제자 중 최고'라는 말을 듣기도 했던 안토니 반 다이크. 그는 이름도 Sir Anthony Vandyke로 표기했고, 왕의 환대를 받으면서 궁정 초상화의 기준을 다시 만들어냈다.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반 다이크는, 한 세기 전 홀바인이 그랬듯이, 영국 회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왼쪽: 안토니 반 다이크, [로멜리니 가의 초상], 1623년. 유화, 254 × 269 cm,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오른쪽: 안토니 반 다이크, [후작부인 엘레나 그리말디의 초상], 1623년. 246 × 173 cm, 워싱턴 국립미술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살이 넘어가면서부터 신동으로 불려졌으며, 16살의 나이에 벌써 작업장을 만들고 조수들까지 고용했다고 한다. 반 다이크 역시 완전히 정착하기 전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이탈리아 대가들의 그림을 보고는 곧바로 몇 년 동안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다. 제노바를 시작으로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를 거쳐 시칠리아까지 돌아본 그는 원래 가지고 있던 북유럽 미술의 토대 위에 이탈리아 미술의 유산까지 흡수하며 (위와 같은 그림을 그려서) 20대에 이미 수많은 귀족들과 예술애호가의 눈길을 사로잡게 된다.

 


이런 안토니 반 다이크에 대해 곰브리치는 "오늘날, 거만한 귀족적인 태도와 궁정적인 세련미를 숭상하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 관한 그림의 기록을 갖게 된 것은 반 다이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 세계를 풍부하게 해주는 명문 출신다운 귀족적인 품위와 신사적인 유유자적한 태도의 이상을 그림 속에 구체화시킨 사람이 바로 반 다이크였다."라고 평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들을 보면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궁정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은연중에 반 다이크와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그림을 우리가 많이 보아왔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이에 대해서는 열 마디 말보다 직접 작품들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어떤가? 굳이 다른 설명도 필요 없이, 위의 그림들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절대왕정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렇게 너무나 환상적인 그림들을 항상 보고 있었으니, 찰스 1세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결국 혁명이 일어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미화된 반 다이크의 작품은 그만큼 완벽했던 것이다.


아무튼 17세기의 반 다이크는 우아하고 위엄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바로크 초상화 시대를 열며, 16세기의 홀바인 이후 정체되어 있던 영국 미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후의 영국 대가들인 조슈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 1723~1792)나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 같은 이들도 반 다이크가 확립해 놓은 초상화의 전형에 도달하려고 했으며, 대륙에서는 로코코 시대 프랑스의 대가 앙투안 와토(Jean Antoine Wateau, 1684~1721)가 그의 초상이 가진 마력을 계승하려 했다고 한다.

 

 
이상으로 대륙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의 궁정화가로 삶을 마감한 두 거장, 한스 홀바인과 안토니 반 다이크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포스팅은 영국 왕족들의 초상화를 수도 없이 그렸던 홀바인과 반 다이크의 특별한 자화상으로 마무리하겠다. 누가 홀바인이고 누가 반 다이크인지는 따로 표시하지 않아도 금새 알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