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에 민주당이 추천했던 조용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 선출안이 결국 부결됐다.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의 헌법에 관한 분쟁을 담당하는 헌법상 독립기관이고, 재판관들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 헌재 재판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않으며, 법적으로 헌재 재판관 9명 가운데 3명은 국회가 추천하게 되어 있다. 국회는 헌재 구성의 다양성을 보장해 소수자의 목소리까지 반영되도록 노력한다는 기본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까지 '여당 1명, 야당 1명, 여야 합의 1명'으로 헌재 재판관을 추천해 왔다. 그래서 1988년 헌번재판소가 창설된 이래로 야당이 추천한 재판관 후보자들도 모두 무리없이 인준을 받았고, 정치적으로도 여야가 각각 추천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의 경우 서로 인정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번에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선출안이 부결됨으로써 헌법상 독립기관에 대한 국회 추천의 기본 정신까지 흔들리게 되었고, 더 나아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국회 추천 몫의 각종 공직 후보자 선출 과정 자체가 매번 불안정한 기류에 휩싸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 것일까? 조용환 후보자가 (다른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에 비해) 특별히 법률적인 자질이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국회는 어째서 지난해 7월 조대현 전 재판관의 퇴임 이후 7개월이 넘게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8명으로 만드는 '위헌적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년 6월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상황을 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시민사회 진영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조용환 후보자
조용환 후보자는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88년부터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인물이다. 수사기관의 불법적 수사와 위헌 소지가 있는 법률에 대해 적극적으로 헌법소원과 위헌제청 신청을 제기했고, 헌법재판소로부터 여러 차례 위헌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 대표적인 사례로는, 피의사실을 알리는 절차를 밟지 않고 피의자를 강제연행하는 행위 등은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이며 손해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이끌어내 수사기관의 부당한 행위로부터 시민의 인권을 지켰고, 피의자가 변호인의 도움을 실질적으로 받을 수 없게 한 수사기관의 행위는 헌법을 위반했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이끌어 낸 바도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국제인권법학회 이사를 지냈고, 독립적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는 데에도 기여했으며, 유엔 인권규약 위반인 국가보안법과 노동법 조항을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소(노동악법과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준법서약서 강요 사례를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소하여 인권규약 위반이라는 결정을 받아냄)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법감시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참여연대가 2008년에 대법관 후보자로 추천하기도 했을 정도로, 조용환 후보자는 시민사회 진영에서 무척 좋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그래서 민주당은 2011년 6월에 개혁적인 조용환 변호사를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추천했고, 얼마 뒤에 그는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받게 된다. 이 자리에서 조용환 후보자는 위장전입 의혹을 받기도 했고, 당시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많은 의혹이 남아있는 천안함 관련 질문도 받게 된다. 바로 이 부분에서 헌법재판관 선출안 부결의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한 발언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바로 위의 이미지에 나와있는 그대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긴 하지만 법률가이기에 직접 보지 않은 사안에 대해 '확신'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은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정당성에 의문이 없는 법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발언과 관련해서 한나라당은 즉각 이념 편향 문제를 제기했고, 이것이 인사청문회 이후부터 최근까지 무려 7개월 동안이나 선출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색깔론에 집착한 새누리당, 공세에 당하기만 한 민주통합당
20년 넘게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조용환 후보자는 소위 말하는 '사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게 되어 버렸고, 한나라당은 계속해서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 선출 투표 절차를 뒤로 미룬다. 말로는 '민주당이 추천한 후보자이기 때문에 민주당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유 표결'을 내세우며 소극적인 자세를 지속한 것이다. (박근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사실, 그 동안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 선출안 통과가 합의될 뻔한 적도 몇 차례 있었다. 지난 9월에 당시 홍준표 대표가 "정치적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엔 보수와 진보 인사가 다 들어가야 하는 만큼 조 후보자 선출안을 통과시켜 주는 게 맞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민주당이 양승태 대법원장 인사청문위원장 자리를 야당 차례인데도 여당에 양보하면서 통과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런데 양승태와 조용환의 '동시 인준'을 요구하던 당시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가 의사 진행 발언까지 해가며 갑자기 대법원장 인준을 동의(무기명 비밀투표, 재석의원 245명 중 찬성 227명, 반대 17명, 기권 1명)해줬고, 한나라당은 그 후 태도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 이후에도 민주당은 11월이나 12월에 김용덕, 박보영 대법관 임명동의안 처리와 조용환 후보의 선출안 통과를 연계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한나라당이 매번 통과 합의를 깨는데도 양승태 대법원장 때와 똑같이 김용덕, 박보영 대법관의 임명을 동의(김용덕: 찬성 203, 반대 4, 기권 1. 박보영: 찬성 200, 반대 7, 기권 1)해주며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다. 솔직히 말해서, 민주당은 이제까지 계속 그렇게 한나라당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국민들의 실망을 자초했고, 한미 FTA 통과나 론스타의 먹튀를 막지 못한 것처럼 조용환 후보자 문제도 마찬가지 행태를 보여왔다. 21세기에 고작 해봐야 시대착오적인 냉전 색깔론을 펴는 한나라당에, 민주당은 자기들 몫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선출까지도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무시당한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려고 하며 민주당이 민주통합당으로 새로 출범하고 난 뒤에도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하다가, 끝내 헌법재판관 선출안은 부결(무기명 비밀투표, 재석의원 252명 중 찬성 115명, 반대 129명, 기권 8명)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한나라당으로부터 '민주당 내 반란표가 생긴 것이 부결의 원인'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처량한 신세인 민주통합당을 과연 어느 국민이 4월 총선에서 지지해 줄 것인가? 국민들이 자신들을 지지해줘야 할 만한 이유를 민주통합당이 과연 잘 보여주고 있는지 의문이다.
[얼마 전에 미래희망연대와 합당한 새누리당의 의석수는 174석이고, 민주통합당의 의석수는 89석이다. 현실적으로 새누리당의 찬성이 없으면 선출안 통과는 힘든데, 이런 상황에서 찬성 115표가 나온 부결의 원인을 '민주당 내 반란표'라고 지목하는 것 자체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새누리당은 수구를 벗어나지 못했고, 민주통합당은 여전히 도로민주당이었다
새누리당은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선출안을 부결시킴으로써 야당의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것, 더 나아가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 셈이 됐다. 진정한 '보수'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진보와의 공존을 추구한다. 하지만 '수구'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색깔만 강조한다. 새누리당은 조용환 후보자의 법률가적 자질이나 도덕성보다 사상 검증에 치중하며,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헌법상 독립기관의 재판관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새누리당은 지난 달 말에 유연한 대북정책을 추진한다는 내용을 담은 새 정강정책을 발표했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우리 당에 앞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당명을 바꾸며 로고에 빨간색도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새누리당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변화 없는 정당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19대 총선을 코앞에 둔 현시점에서 야당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에 총선 이후에 새누리당이 소수당으로 전락하고 야당이 다수당이 된다면, 새누리당은 국회에서 야당이 벌이는 모든 표결 결과에 대해 두말없이 따르겠는가?
|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선출안 부결에 관한 민변의 논평 [클릭] |
민주통합당은 조용환 선출안을 통과시키지 못함으로써, 민주통합당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무기력하며 전략도 없고 안일한 도로민주당임을 자인하는 꼴이 됐다. 노무현 정권 실패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한명숙 대표는 너무나 무능했으며, 도로민주당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김진표 원내대표는 한없이 무책임했다. 박근혜의 첫 작품이 당명과 로고 그리고 정강정책을 바꿔도 새누리당은 그대로 수구세력이라는 걸 들킨 것이라면, 한명숙의 첫 작품 역시 아무리 민주통합당으로 새로 출범해도 현재 제1야당은 여전히 나태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 '도로민주당'이라는 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다 보여줘 버린 것이다. 선거 이후에 추진했으면 쉽게 통과될 수도 있는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이런 식으로 어이없게 탈락시킨 민주통합당을 국민들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동안에도 민주통합당은 이명박 정권에서 핍박 받는 많은 시민들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했고, 민주주의의 명백한 퇴행을 막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주통합당이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4월 총선은 물론이고 12월 대선도 전혀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이다. 민주통합당이 한 가지 분명하게 명심해야 할 것은, 국민들이 새누리당을 싫어하는 것이지 민주통합당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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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뵤올 2012/02/10 14: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효.. 이러니 국민들이 정치를 외면하죠..ㅡㅡ
그래도 정치란게 그나마 덜 부패한 쪽을 손을 들어줘야 하는건가 봅니다.
일단 최악을 하나 제외시키고 나면, 결국 나머지 중에 하나를 뽑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와 동시에 정치혐오와 무관심에 빠지지 않는 것도 필요하죠..
그런 측면에서 2012년의 선택 방향은 어느 정도 명확한 듯~